<백조의 호수>는 발레의 대명사다. 순백의 튀튀를 입고 머리에 깃털 장식을 붙인 발레리나들의 모습이 발레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됐다가 밤에는 다시 인간이 되는 오데트 공주와 그녀에게 매혹된 지그프리트 왕자의 사랑을 그렸다.
글 장지영 국민일보 선임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최재우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백조의 호수>는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음악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났다. 이후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클래식 발레의 아버지’ 마리우스 프티파와 그의 조수인 레프 이바노프가 다시 안무하면서 불멸의 레퍼토리가 됐다.
프티파-이바노프 이후 수많은 안무가가 <백조의 호수> 재안무에 나섰다. 그 인기만큼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기 때문에 새로운 <백조의 호수>가 나온다고 해도 더 이상 놀랍거나 흥미롭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지난 8월 23~25일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중국의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보다 강렬할 수 없다, 서커스 발레로 만난 <백조의 호수>
시안 아크로바틱 예술단이 선보인 <백조의 호수>는 ‘백조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공주와 왕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원작 발레의 큰 뼈대를 유지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줄거리는 동양의 공주가 나쁜 마법사의 저주에 걸리는 것을 꿈에서 본 서양의 왕자가 이집트, 인도,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장안까지 공주를 찾아오는 여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원작 발레에선 백조 오딜과 흑조 오데트를 한 명이 연기하지만, 이 작품에선 다른 무용수가 각각 연기한다. 그리고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도 해피 엔딩으로 바뀌었다.
‘아크로바틱 발레’ ‘서커스 발레’라는 수식어에서 일부 관객은 발레에 포커스를 두고 이번 공연을 보러 왔다가 당황하기도 한다. 저글링, 줄타기, 후프 돌리기, 장대 묘기, 아크로바틱 퍼포먼스 등 서커스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저글링 등에서 자잘한 실수가 나오기도 했지만 고난도 퍼포먼스로 관객을 몰입시키며 이야기의 빈틈을 메운다.
서커스가 중심이지만 발레를 모티프로 한 만큼 정통 발레 동작과 안무가 적지 않게 포함됐다. 토슈즈를 신은 여성 무용수들의 군무나 남녀 파드되 2인무는 발레 <백조의 호수>에 등장하는 동작과 겹친다. 무용수들 대부분이 곡예와 발레를 모두 배운 덕분이다. 이와 함께 <백조의 호수> 중 유명한 4마리 백조의 춤을 패러디한 것도 흥미롭다. 4명의 남성 무용수가 백조 의상을 입고 코믹하게 춤을 추는가 하면 4마리 개구리가 등장해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왕자와 공주의 파드되다. 1막 후반부의 왕자가 공주를 처음 만나는 장면, 2막 후반부에서 왕자가 마법사와 싸워 공주의 저주를 푸는 장면에 각각 나온다. 특히 공주가 왕자의 어깨나 머리 위에서 피루에트나 아라베스크를 하는 등 각종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스릴 때문에 객석 곳곳에서 감탄이 튀어나온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저우지에와 쑨위나는 아크로바틱 기량은 물론 표현력도 발군이었다.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가 바로 이 파드되에서 시작된 데서 알 수 있듯 압도적인 강렬함을 자랑한다.
이 파드되는 원래 중국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단원이었던 웨이바오화-우젱단 부부가 1998년 ‘동양의 백조-머리 위에서 춤추는 발레’란 제목으로 처음 선보였다. 그러다가 이 파드되를 본 중국 안무가 자오밍의 아이디어로부터 2004년 <백조의 호수> 모티프의 전막 서커스 발레가 만들어졌다.
극한의 테크닉에 발레의 예술성을 더하다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 서커스단들은 다양한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를 나열식으로 보여 주는 데 그쳤다. 과거에 한국에 왔던 중국 서커스단들이나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서커스 공연장에서 볼 수 있던 공연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서구에서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컨템퍼러리 서커스(또는 뉴 서커스)’가 아크로바틱한 테크닉을 활용해 스토리와 테마를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중국은 전통적인 형식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서커스 강국이라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최신 서커스 트렌드와 거리가 있던 중국에서 놀라운 테크닉을 한층 세련되고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전환점이 된 것이 바로 이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다. 당시 중국에서도 이 작품에 대해 “서커스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서커스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찬사가 나왔을 정도다.
서양 발레의 낭만과 동양 서커스의 스릴이 결합된 서커스 발레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예술 형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2004년 중국 초연 이후 해외에서도 많은 초청을 받았다. 유튜브에도 관련 영상이 공개돼 있는데, 왕자와 공주의 파드되는 3,000만 뷰가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주역을 맡았던 두 단원의 노화와 함께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조직 정비로 공연이 중단돼 아쉬움을 자아냈었다. 다행히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과 청두 깃발 아크로바틱 예술단 출신 단원들을 중심으로 2019년 새롭게 설립된 시안 아크로바틱 예술단이 이 작품을 리바이벌한 뒤 해외 투어 공연에 나선 덕분에 이번에 한국에서도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스릴 넘치는 아크로바틱과 우아한 발레 무브먼트로 <백조의 호수> 상연사에 새롭게 이름을 각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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