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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1]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거장들이 빚어낸 극한의 아름다움

언어보다 더 풍부한 이미지로 무대를 채우는 연출가 로버트 윌슨과 존재감 자체로 관객을 압도하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두 사람이 올가을 성남아트센터를 찾아온다. 2019년 파리시립극장(Theatrede la Ville) 초연작인 <메리 스튜어트 Mary Said What She Said>,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내밀한 독백을 동시대 최고 예술가들의 감각으로 만나는 무대다.


김주연 연극 평론가

© LUCIE JANSCH

© Bronwen Sharp

연극사의 살아 있는 전설 로버트 윌슨과 스크린의 여왕 이자벨 위페르의 만남이라니, 듣고서도 귀를 의심할 만큼 신선하고 놀라운 조합이지만 사실 두 사람은 이미 두 차례나 함께 무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1993년 로버트 윌슨은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을 대릴 핑크니가 각색한 모놀로그 <올란도>의 프랑스어 버전에서 위페르와 함께 경이로운 조합을 보여 준 바 있다. 이후 윌슨의 또 다른 연출작 <콰르텟>에서도 위페르는 섬세하고 세련된 무대 연기를 선보였는데 이는 여러 배우들과 함께 출연한 작품으로, 단 한 명의 배우가 모든 무대를 이끌어 가는 모놀로그와는 결이 다른 공연이었다.

<올란도>에서 영국의 300년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내는, 그것도 남성과 여성의 서로 다른 위치와 시선에서 관통하는 올란도 역을 맡아 완벽한 호흡과 연기를 선보였던 위페르와 윌슨이 30년 만에 다시 모놀로그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메리 스튜어트>는 기획 단계부터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게다가 영국 왕실을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하고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메리 스튜어트의 내밀한 편지를 바탕으로 한 독백이라니. 뜨거운 관심 속에 파리 테아트르 드 라빌 무대에서 초연된 <메리 스튜어트>는 “실로 완벽한 듀오”라는 극찬을 받으며 유럽의 관객을 사로잡았고, 이제 성남아트센터에서 아시아 초연으로 한국 관객들을 만난다. 영광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

영국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엘리자베스 1세와 종종 함께 언급되곤 하는 메리 스튜어트는 영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스코틀랜드의 왕조 스튜어트가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인 메리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대관식을 치렀고 프랑스 왕비, 스코틀랜드 여왕,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라는 화려한 왕관을 겹으로 썼지만, 바로 그 고귀한 신분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어릴 적 프랑스 궁정으로 시집가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메리는 왕비 즉위 1년 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는 바람에 초고속 과부가 되어 조국 스코틀랜드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코틀랜드는 신교와 구교의 대립으로 첨예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중이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는 스코틀랜드에 굳게 뿌리내린 프로테스탄트 귀족 및 백성들과 살얼음 같은 공존의 길을 걸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헨리 단리 경과의 무색무취한 결혼과 남편의 의문사, 불륜인지 납치인지 애매모호하게 진행된 보스웰 백작과의 재혼, 쌍둥이 유산 등 개인적으로도 매우 혹독하고 불행한 사건들을 겪었다. 결국 보스웰과의 결혼으로 민심도 잃고 여왕으로서의 권위도 상실한 메리는 전국에서 일어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패배했고,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한 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 중인 잉글랜드로 몸을 피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메리 스튜어트라는 인물은 참으로 미묘하고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운 친척인 데다 신성한 왕실의 핏줄인 메리를 대놓고 버릴 수는 없지만, 정치적 및 외교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로부터 방치당한 채 18년간 영국 변방의 성들을 떠돌며 삼엄한 감시와 경계 속에 살았고, 결국 가톨릭교도 역모 가담 혐의로 참수형을 당했다. 처형의 순간에도 그녀는 가톨릭에서 순교자를 상징하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고개를 내밀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고귀했으나 또한 비참했던 여인, 메리 스튜어트의 기구한 삶은 후세의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실러의 희곡, 도니제티의 오페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전기 소설을 비롯해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 드라마 <레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역사물의 소재가 되어 왔다.


마지막 순간을 앞둔 처절한 독백

이번 작품 <메리 스튜어트>는 죽음을 앞둔 메리 스튜어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를 바탕으로 한 회상과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 <올란도> <도리안> 등 여러 작품에서 로버트 윌슨과 호흡을 맞춰 온 극작가 대릴 핑크니는 메리의 일대기나 드라마틱한 사건보다는 그녀의 내면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3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차분하면서도 격정적인 독백을 선보인다.

다가올 처형을 앞둔 고요한 밤, 차가운 달빛 아래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메리는 무수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과 운명을 돌이켜본다. 1부에서는 프랑스에서 보낸 왕비 시절이, 2부에서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의 사건들과 감금 생활이, 그리고 3부에서는 그녀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신구교의 충돌이 주를 이룬다. 언뜻 들으면 마지막 고해 성사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내면의 대화 같기도 한 독백 속에서 메리는 모욕당한 여왕의 괴로움, 세 남편에 대한 애증, 네 명의 시녀에 대한 그리움, 부당한 선고에 대한 고통 등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고, 그 사이사이 그녀가 겪었던 짧고 눈부신 행복과 형용할 수 없는 불행이 스쳐 지나간다.

© LUCIE JANSCH

하지만 극중 메리도, 작가인 대릴도 그녀가 정말 전남편을 죽였는지, 보스웰과 모략을 꾸몄는지,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역모에 직접 참여했는지와 같은 역사적인 진실을 밝히는 데 목소리를 높이진 않는다. 억지로 그녀의 삶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진실 여부가 아니라 삶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메리의 태도이다. “나는 모든 순간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형벌을 받았어”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메리는 그 모든 비극과 고통의 궤적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떠밀려 간 절대적인 힘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운명이었음을 당당하게 인정한다. 비록 그 선택이 그녀를 항상 궁지로 몰아넣고 비극적으로 끝났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선택과 열정에 충실했으며 마지막까지 여왕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고, 그것이 그녀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 LUCIE JANSCH

존재만으로 압도적인 배우

이렇듯 복잡하고 섬세한 메리의 내면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어떤 상대역도 없이 오로지 혼자만의 독백으로 90분의 공연을, 나아가 메리 스튜어트의 한 많은 인생을 통째로 구현해야 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우들에게는 그 자체로 엄청난 압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리 역을 맡은 배우가 이자벨 위페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그 이름과 존재만으로 이미 관객을 압도하고 인정하게 만드는 배우, 바로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모놀로그는 그 자체로 배우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장르이기에, 이미 두 번이나 위페르와 모놀로그를 작업한 로버트 윌슨이 얼마나 그녀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지는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을 듯하다.

사실 위페르에 대한 설명도 굳이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프랑스 영화의 아이콘이자 베니스와 칸 영화제를 각기 두 번씩이나 석권한 위대한 배우, 데뷔 이후 100편 이상의 영화와 드라마, 연극에 출연하면서 한계가 없는 연기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혹적인 아름다움과 분위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배우. 그녀의 눈부신 업적과 대표작을 일일이 나열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명성과 경력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그녀의 작품을 딱 한 편만 집중해서 본다면 이 배우의 독보적인 존재감과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지적인 해석을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무대에서도 위페르는 시종일관 당당하고 처연한 자태와 표정으로 객석을 사로잡는다. 그림처럼 꼿꼿한 자세와 춤을 추듯 우아한 몸놀림, 기도하듯 노래하듯 읊조리는 목소리와 격정 속에 떨구는 눈물 한 방울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구석이 없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유럽 영화의 주인공으로, 또 최근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로 널리 알려진 배우지만, 환한 조명 아래 섬세한 숨소리와 호흡을 고르는 순간의 정적마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녀의 무대 연기는 스크린과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관객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살아 있는 전설, 로버트 윌슨 메리 스튜어트의 삶, 대릴 핑크니의 대본,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 이렇듯 훌륭한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로버트 윌슨이라는 위대한 연출가를 빼고는 이 작품을 이야기할 수 없다. 현대 공연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이미지극의 대가로 손꼽히는 윌슨은 빛과 움직임, 텍스트와 음악 등 다양한 요소들을 비범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엮어 내어 매혹적인 미장센을 만들어 내는 연출가다. 무대 위에 그가 구현해 내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아름다움과 강렬한 감정을 선사하면서, 그의 이름을 무대 미학의 한 장르로 굳혔다.

특히 조명과 색감이 만들어 내는 선명한 시각적 효과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윌슨은 예전부터 “나의 무대에서 빛은 하나의 배우로 기능한다”고 말할 만큼 빛과 조명에 예민한 연출가인데, 이번 무대에서도 아무런 세트나 소품이라곤 없는 텅 빈무대를 오로지 빛과 조명으로 가득 채우면서 메리가 놓인 상황과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낼 예정이다. 또, 수많은 오페라 작업을 통해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해석을 보여 준 바 있는 윌슨은 이번 작품에서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와 함께 강렬하고 고풍스러운 음악적 풍경을 선보인다. 서사적인 사건 대신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인 만큼, 음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도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며 메리의 감정을 무대 위에 수놓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터다.

로버트 윌슨은 2000년 <바다의 여인>으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셰익스피어 소네트> <해변의 아인슈타인> 등의 작품으로 꾸준히 한국 관객들과 만나 왔다. 작품마다 모두 분위기와 색깔, 결이 다르기에 그의 공연이 어떻다고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니, 애초부터 윌슨의 작품 세계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대신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했던 말을 윌슨의 작품에 대해서도 똑같이 인용하고 싶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아.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이지.”

그의 무대를, 그가 만들어 내는 극치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올가을 직접 그 강렬한 이미지를 경험해 보는 것뿐이라고.


이자벨 위페르의 <메리 스튜어트>

일시 | 11월 1일(금) 오후 7시 30분, 2일(토) 오후 3시

장소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문의 | 031-783-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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