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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디자인] 자동차에 대하여: 이동 수단 이상의 상징물

세상에 나온 새로운 물건이란 모두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려고 옷이 생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최초로 사용하게 된 이유는 분명 상징적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토기(土器)는 우연히 발명되었고, 처음에는 부족의 우두머리 같은 권력자들이 사용했다. 자연스럽게 그 최초의 그릇은 권력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최초의 쓸모를 갖게 된다. 최초의 직조 기술로 만든 옷, 최초의 목수기술로 만든 의자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기술이 보편화되고 그 실용적 쓰임에 눈을 뜨면 그 신기한 물건도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용품이 된다. 그렇다면 자동차는 어떨까.


루이지 루솔로의 <자동차의 역동성>, 1913년. 자동차의 스피드에 열광한 이탈리아 미래파 회화 ⓒ Luigi Russolo


사치품이자 지위재로

자동차도 같은 진화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독일의 자동차 발명자인 카를 벤츠(Karl Friedrich Benz, 1844~1929)와 고틀리프 다임러(Gottlieb Wilhelm Daimler, 1834~1900)는 한동안 자동차의 실용성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사람들은 이 혁신적인 물건을 불편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지금과는 현격하게 다른 당시의 이동 문화를 상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동차 없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자동차가 절박하게 필요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자동차의 발명 자체가 수요를 창출한 것이다.

자동차의 가치를 알아준 건 역시 부자들이었다. 특히 사치와 멋을 아는 프랑스 부자들이 먼저 자동차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자동차 잡지가 생기고 최초의 자동차 경주 대회가 열렸다.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그제야 판매의 돌파구를 알아챘다. 그들은 속도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고급 사치품으로서 자동차를 적극 광고했다. 무엇보다도 말이 마차를 끌지 않고 자체 동력으로 가는 신기한 자동차를 타고 거리를 누비는 것은 상당한 우월감을 준다는 점에서 부자들을 매혹시켰다.

그러다 20세기 초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동차를 대중화시켰다. 그는 조립 라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자동차 가격을 대폭 낮췄다. 이때 자동차는 지위재(地位財)로서의 역할을 그만두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세 고급 자재와 스타일링이 등장해 다시 사치품으로서 자동차의 구실은 더욱 강화되었다. 지금도 개인이 소유한 물건 중 자동차만큼 사회적 지위와 부를 쉽게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내 집을 자랑하려고 들고 다닐 수는 없지만, 자동차는 언제든 끌고 가서 보여 줄 수 있지 않은가.

카를 벤츠가 만든 최초의 자동차, 1885년


욕망을 깨운 스피드

이처럼 초기 자동차의 목적은 단순히 이동이라는 실용성이 아니다. 사회적 지위와 부, 우월감의 과시가 더 컸다. 이미 말과 마차를 소유한 부자들은 자동차로는 색다른 경험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스피드다. 하지만 뚜껑이 없는 초기 자동차는 자동차 ‘안’이 아니라 ‘위’에서 운전했다고 할 정도로 몸이 외부로 노출되었다. 심지어 늘 흙이 튀어 내부가 쉽게 더러워졌고 사고가 나면 앞 유리가 운전자의 얼굴로 날아오는 터라 아예 앞 유리를 제거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고글과 마스크, 방수 옷은 운전자의 필수 장비였다. 또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어서 운전자의 몸은 덜덜거리며 요동을 쳤다. 이처럼 자동차 운전은 말을 타는 것처럼 격렬하게 스피드를 느끼는 일이었다.

자동차 운전이 주는 자극은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완전히 새로운 쾌락이었다. 이 쾌락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도로 위험한 모험이기도 했다. 자동차 경주대회는 이런 쾌락을 만끽하고 가장 위험한 모험을 기꺼이 받아들인 운전자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자동차 경주 대회는 점점 개인의 영광을 넘어 제조사와 국가의 기술력과 자존심 대결로 승화돼 전쟁에 비유될 정도였다. 사실 오늘날 스포츠를 통한 국가 간 경쟁은 자동차 경주 대회가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동차는 현대 사회에 ‘스피드를 향한 열광’이라는 뚜렷한 문화 현상을 낳았다. 예술가들은 자동차의 스피드에 압도되어 미래파와 같은 새로운 양식을 낳기도 했다. 이제 스피드를 온몸으로 느끼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전한 자동차로 깨끗한 포장도로를 달리게 되었지만, 우리의 질주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프랑스 자동차 레이싱을 촬영한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사진, 1912년. 외부에 노출된 레이서는 고글과 마스크를 썼다 © Jacques Henri Lartigue


기계 미학에 매료된 예술가들

사람들이 자동차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던 초기 시절 제조사들의 마케팅 전략 중 하나는 자동차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자동차는 기본적으로 마차에서 온 형태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갔다. 특히 스피드를 향상시키려는 과정에서 마차와는 완전히 다른 자동차만의 매력을 갖추게 된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진 작가 자크앙리 라르티그(Jacques-Henri Lartigue, 1894~1986)가 찍은 자동차 경주 대회 사진을 보면, 레이싱 카의 그 기계적 외관에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다.

모던 건축의 거장들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와 르코르뷔지에(LeCorbusier, 1887~1965)도 자동차에 매료된 대표적 인물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직접 자동차를 디자인했다. 르코르뷔지에는 한발 더 나아가 모던 건축의 경전과도 같은 『건축을 향하여』에서 과거의 건축 양식만을 답습하는 구태의연한 건축가들을 향해 자동차를 보라고 외친다. 그는 표준화로 나아가는 현대 산업 기술 문명의 아이콘으로서 자동차를 묘사한다. 자동차는 마차와 완전히 결별했는데, 집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한다. 그리하여 “집은 살기 위한 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저 유명한 명제를 말하기에 이른다. 모더니즘의 기계 미학은 자동차 디자인에 많은 빚을 진 셈이다. 기계 미학의 시대를 지나 자동차는 유선형 외관의 매끈한 표면을 자랑하는 시대를 연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1955년에 출시된 시트로엥 DS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자동차는 거대한 고딕 성당과 같다. 익명의 예술가들이 열정을 바쳐 만든 결과물이라는 데서 그렇다. 자동차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게 매력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최고의 창작품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한다. 자동차는 스피드를 위한 연금술로 창조되지만 이미지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모든 제조사들은 신차 발표회와 모터쇼에서 자동차 판매에 있어 이미지와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롤랑 바르트가 고딕 성당에 비유한 시트로엥 DS, 1955년. 시트로엥 DS는 20세기 자동차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대량 생산과 ‘모델 T’의 탄생

대량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자동차는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헨리 포드는 1913년, ‘조립 라인’이라는 혁신적인 생산 기술을 창조했다. 그전까지 자동차는 한자리에 있고, 기술자들이 부품을 가져와 조립하면서 하나의 차가 완성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산한 자동차는 비쌀 수밖에 없어서 자동차는 그야말로 부자들의 전유물로 머물렀다. 포드가 발명한 조립 라인에서는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자동차가 이동하면서 여러 부품들이 결합돼 점차 완성되어 간다. 이 생산라인에서는 끊임없이 자동차들이 이동하고 한 가지 임무만을 맡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가만히 서서 생산에 참여한다. 조립 라인은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그 결과 자동차 가격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생산된 차가 그 유명한 포드 모델 T이고, 무려 1천5백만 대를 팔았다. 자동차 가격의 대폭 하락으로 이제 노동자들조차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포드가 발명한 조립 라인은 전 세계 자동차 공장으로 퍼졌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재를 만드는 모든 공장으로 퍼져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사회를 열어젖혔다. 오늘날의 낭비적인 소비주의 사회는 바로 자동차 생산으로 시작된 것이다.

포드 모델 T의 코펜하겐 조립 라인 공장, 1923년


쉐보레부터 캐딜락까지

잘 나가던 포드 모델 T는 1927년에 종말을 고했다. 포드의 대량 생산 방식은 다양성이 없다는 결정적인 위험 요소가 있었다. 자동차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사람들은 결코 포드 모델T를 구입하지 않았다. 이를 간파한 GM의 경영자 알프레드 슬론(Alfred Sloan, 1875~1966)은 자사가 보유한 여러 브랜드로 차별화된 자동차를 생산했다. 최고급 모델 캐딜락부터 뷰익, 폰티악, 올즈모빌, 그리고 가장 저렴한 쉐보레까지 타깃이 다른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추었다. 슬론은 또한 자동차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자동차 회사에 스타일링 부서를 처음으로 갖춘 것이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엔지니어들이 설계했던 반면, 슬론은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그가 고용한 디자이너 할리 얼(Harley J. Earl, 1893~1969)은 할리우드의 스타 고객을 위해 획일화된 양산 차를 단 하나의 차로 개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가 슬론에게 발탁되었다. 슬론은 각 브랜드별로 서로 다른 디자인을 적용하는 일, 그리고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사치품으로서 외관을 매력적으로 꾸며 소비자의 눈을 즐겁게 하는 일이 앞으로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이끄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탁월한 경영자였다. 그는 또한 자동차 모델의 디자인 변화 주기를 더욱 빠르게 해서 소비자가 자신의 차가 멀쩡한데도 진부하게 느껴 새 차를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것을 ‘역동적인 진부화(dynamic obsolescence)’라고 불렀다. 이는 1930년대에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라는 소비주의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체계화된다. 현대인들이 새 상품을 본 뒤 이미 자기가 구매한 물건에 금방 싫증을 느끼는 현상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캐딜락 잡지 광고, 1927년. GM은 포드와 달리 다양한 모델로 차별화했다


사치품에서 생필품으로

차가 대중화되자 자동차의 신비로운 이미지도 점차 사라졌다. 이제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자동차를 전제한 것으로 차 없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에 따라 자동차 자체의 신분도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다. 구매와 사용 과정에서 자동차처럼 극적으로 천상에서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는 사물도 없을 것이다. 광고에서, 잡지에서, 모터쇼에서, 쇼룸에서 자동차는 예술품처럼 묘사되고 대접받는다. 영화 속 주연 배우처럼 자동차는 늘 환상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내가 소유하기 전 자동차는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난 구불구불한 길을 부드럽고 미끈하게 달려가는 그런 이미지다. 그런 차를 대하는 소비자의 마음은 여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차가 내 차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서 익숙해지면 어느새 매일 마주치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된다. 처음엔 눈부시게 보였던 디자인도 점차 무덤덤해지고 만다. 시간이 흐를수록 차에 대한 애정도 식고 청소나 정비도 소홀해지며 차는 고장이 나고 낡아 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동차만큼 격렬하게 일하는 개인이 소유한 물건이 또 있을까. 가족의 발이 되어 수 십만 킬로미터를 달리는 기계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자동차는 사람처럼, 내 배우자처럼 병들고 늙어 가며 고독해진다. 다만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차는 결국 에는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와의 이별, 그 이상의 의미

한 자동차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 애완동물처럼 자동차는 사람보다 수명이 짧다. 차와 이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내 차가 감정적으로 싫어질 수 있다. 갑자기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고와 같은 나쁜 기억의 저장소가 되어서, 높아진 주인의 위상에 걸맞지 않아서, 무엇보다도 새로 나온 차에 반해 버려서… 등등. 이런 경우는 이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돈 많은 주인일수록 이혼할 확률이 높다.

평범한 주인은 보통 이별을 택한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차에 정말 깊은 애정을 지녀서일 수도 있다. 이별은 차가 기능적으로 더 이상 주인을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 없을 때 찾아온다. 차와 이별하는 순간이 올 때 비로소 주인은 차의 가치를 알게 된다. 보편적인 차의 가치가 아니라 바로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내’ 차의 가치다. 내 차는 수많은 동일한 모델 중 하나일지라도, 나와 함께한 순간부터는 모든 여행과 기억 그리고 가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차가 된다. 그렇게 차는 가족의 일원이 된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차와 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차와의 이별이 싸구려 물건을 버리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수고했어” “미안했어” “고마웠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차는 고철이 되어 눈앞에서 사라진다.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 그 이상이다.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월간 <미술공예> 기자를 거쳐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13년에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2014년부터 칼럼니스트로 독립해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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