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연극(the Theater of Images)’이란 용어는 연극이론가 보니 마란카가 처음 명명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1941~)부터 떠올린다. 빛, 소리, 움직임 등 선명한 시청각적 이미지를 이용해 한 편의 시처럼 은유적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그의 작품들은 서사를 중시하는 기존의 무대들에 도전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 왔고, 그의 이름은 그 자체로 이미지 연극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꿈을 꾼 것같이 오랜 잔상을 남기는 연출가 윌슨의 또 하나의 작품이 11월 1일과 2일, 성남아트센터 무대에 오른다. 연극 <메리 스튜어트>의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서면으로 미리 만나 보았다.
© Bronwen Sharp
이번 공연 <메리 스튜어트 Mary Said What She Said>는 무엇보다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의 두 번째 모노드라마라는 점에서 뜨거운 관심과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두 사람은 이미 30년 전 또 다른 1인극인 <올란도>의 프랑스어 버전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으며, 이후 하이너 뮐러의 <콰르텟>에서도 함께 작업했다. 모든 작품에서 연출과 배우의 합은 공연의 완성도를 좌지우지할 만큼 중요하지만, 특히 오롯이 배우 혼자서 공연 전체를 이끌어 가야 하는 모노드라마에서 배우에 대한 연출의 믿음과 기대는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로서 이자벨 위페르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윌슨은 짧지만 확실한 생각을 보내왔다.
“제가 이자벨에 대해 가장 좋아하는 점은 그녀가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녀에게 형식적인 디렉션 몇 가지를 요구할 뿐입니다. 더 느리게, 더 빠르게, 더 거칠게, 더 내면적으로, 더 드러내서! 하고 말이죠. 지난 59년간 극장에서 일하면서 저는 단 한 번도 배우에게 작품에 대해, 인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저의 형식적인 디렉션을 그들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채워 가며 인물을 구현해 냅니다. 배우들은 인물을 만들 때 엄격한 틀을 구축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자유를 함께 부여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기계적인 반복과 훈련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할수록 그들은 더 자유로워지더군요.”
30년을 돌아온, 두 거장의 재회
윌슨이 이자벨 위페르와 모놀로그 <올란도>의 프랑스어 버전을 초연한 것은 1993년이었다. 이번에 다시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기까지 무려 3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을 변했을 긴 시간 뒤에 다시 만나 작업을 하다 보면, 분명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지점이나 변화를 발견하게 되기 마련이다. 윌슨은 이자벨이 지닌 비밀스런 미스터리가 바로 그녀의 알 수 없는 매력이라고 설명한다.
“1970년대 초에 이자벨을 알게 된 이래로 그녀는 음역대와 감정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어마어마한 성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미스터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비밀은 끊임없이 우리를 그녀에게로 끌어당깁니다. 이러한 지점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한편 이번 작품의 대본을 쓴 대릴 핑크니 또한 로버트 윌슨의 오랜 동지이자 작업자이다. 그동안 윌슨은 핑크니와 함께 <올란도> <도리안> <페소아-내가 된 이후> 등 많은 작품을 함께해 왔다. 그중에는 <올란도>처럼 원작자(버지니아 울프)의 대본을 핑크니가 공연에 맞게 각색한 것도 있고, 이번 작품처럼 아예 그가 직접 텍스트를 쓴 작품도 있다. 공연의 서사나 텍스트보다는 이미지와 시청각적 요소를 더 중시하는 연출가로서 핑크니 텍스트의 어떤 부분에 특히 매력을 느끼는지 물어보았다.
“대릴 핑크니는 자신만의 개인적이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되돌아보고 비춰볼 수 있는 작가이며 매우 박식한 역사가이기도 합니다. 대릴의 글쓰기는 그 시대에 대해, 그 인물에 대해 자유롭게 연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로 하여금 그의 글쓰기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작품에 끌려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입니다. 대릴이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 쓴 이번 텍스트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점은 그가 그녀의 삶에 대해 어떤 대답도 주지 않으면서 반대로 그녀의 삶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 윌슨의 연출작 <페소아 Pessoa Since I've been me> © Lucie Jansch
실제로 대릴 핑크니는 죽음을 앞둔 메리 스튜어트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회상과 독백을 풀어놓지만, 그녀의 삶과 관련된 주요 미스터리(메리 스튜어트가 정말 남편을 죽였는지,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모반에 직접 연루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메리 스스로 자신의 삶에 질문을 던지게 함으로써 다층적인 시각으로 그녀의 삶을 바라보게 만든다. 한편, 이 작품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극중 메리 스튜어트가 자신을 따르던 4명의 시녀를 끊임없이 기억으로 호명한다는 점이다. 이들 4명의 시녀는 신기하게도 모두 메리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메리가 기억하는 메리, 메리가 그리워하는 메리, 메리가 원망하는 메리 등 반복해서 불리고 섞이고 겹치는 ‘메리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작품안에서 또 다른 층위의 의미망을 만들어 낸다. 인터뷰에서 윌슨은 이러한 ‘메리들’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도 열린 입장을 이어 갔다.
“사람들이 극중 ‘메리들’의 의미를 종종 묻곤 하지만, 저로서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매번 저는 그녀들을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곤 해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제 연극은 ‘해석’을 위한 연극이 아닙니다.” 해석이 아닌, 감각으로 만나는 무대
분명 윌슨의 연극은 해석보다는 감각으로 이해해야 하는 연극이다. 다른 연극 작품처럼 서사를 분석하고 대사 하나하나를 되새기기보다는 눈과 귀를 활짝 열고서 무대 위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 강렬한 조명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빛이라 할 수 있는데 이번 무대에서도 아무런 세트도, 소품도 없는 텅 빈 무대를 창백한 빛으로 가득 채울 예정이다. 윌슨은 무대 위의 빛에 대해서 언제나처럼 단호하고 확실한 의견을 보내왔다.
“조명에 대해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했듯이 ‘빛은 모든 것의 척도’입니다. 빛이 없다면 공간도 없죠. 빛은 무대 위에 첫 시작점인 공간을 창조해 내고 프로덕션 전체에 걸쳐 발전시켜 갑니다. 제 연극에서는 빛, 소품, 움직임, 텍스트와 같은 모든 요소들이 똑같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모두 공연이라는 하나의 구조물의 일부분이니까요. 여기에 음악까지 포함해 모든 요소들이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함께 엮여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로버트 윌슨의 이름은 그 자체로 공연계에서 하나의 장르, 혹은 전설이 되어 왔지만, 그는 여전히 전설이다. 이미 80세를 넘긴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활발하게 다양한 예술가들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로버트 윌슨은 리투아니아의 작곡가 지부오클레 마르티나이티테와 함께 빌뉴스 오페라 하우스가 제작하는 새로운 오페라 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끝없는 도전과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게 만드는지 원동력이 궁금했다. 또한 비디오와 증강 현실, 가상 체험 등 다양한 미디어와 장비가 널린 이 시대에 극장이라는 공간과 공연이라는 장르가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특별한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살아 있는 전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로버트 윌슨 연출 <서푼짜리 오페라> © Leslev Leslie-Spinks
“인생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매 순간 결코 같지 않으니까요. 제게 끊임없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변화입니다.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것은 무엇이 될까요? 이러한 질문들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그리고 극장은 매우 특별한 공간입니다. 이곳은 고대에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일정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함께 나누었던 오래된 형태입니다. 함께 존재하면서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는 극장에서 자신과 완전히 다른 정치적·사회적·경제적·종교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한 공간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장이라는 공간은 사회에서 매우 독특하고 고유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매 순간 변화를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곧 삶이자 예술이라고 생각했기에, 윌슨은 무대 작업에 있어서도 언제나 변화에 열린 자세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왔고 그 덕분에 공연예술의 장르와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을 받았다. 59년의 세월을 무대 위에서, 또 무대 뒤에서 살아오면서 로버트 윌슨은 연극과 오페라, 음악극과 실험극 등 수많은 공연을 제작했으며 그 속에서 여러 배우, 음악가, 작가들과 협업을 이어 왔다. 새로운 예술가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객과의 만남 역시 언제나 설레고 그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실제로 미국, 유럽, 아시아를 비롯해 전 세계 각지의 극장에 초청받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바 있다. 한국에도 이미 <바다의 여인>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셰익스피어 소네트> <해변의 아인슈타인> 등 여러 작품이 소개된 바 있는데, 그는 이번 공연 이후에도 또 다른 자신의 작품을 한국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가 다음번에 우리에게 선보일 작품은 무엇이 될지, 여전히 원기 왕성한 그가 앞으로는 어떤 작품들에 새롭게 도전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하지만 일단은 올가을 성남아트센터를 찾아오는 <메리 스튜어트>의 무대부터 만날 차례다. 그의 조언에 따라 머릿속으로 해석하기를 멈추고, 온 감각을 열어젖힌 채 윌슨과 위페르가 그려 내는 메리 스튜어트의 슬픔과 회한, 고통과 영광의 순간들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아름다움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마주하는 깊은 이해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글 김주연 연극 평론가
월간 <객석> 기자로 출발해 공연과 문화에 관련된 글쓰기와 강의, 드라마터그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저서로 『페테르부르크 막이 오른다』와 『슬라브 막이 오른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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