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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 보티스 세바 & 파 프롬 더 놈 <블랙독> 힙합의 예술적 가능성을 발견하다

힙합 댄스 시어터 <블랙독(BLKDOG)>은 2018년 런던의 세계적인 무용 극장 새들러스 웰스의 20주년 기념 위촉공연으로 제작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의 성공은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올리비에상의 ‘최우수 뉴 댄스 프로덕션’ 부문 수상(2019)으로 증명되었으며, 세계 예술 축제인 애들레이드 페스티벌2021에서 ‘춤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면 꼭 봐야 할 공연’이라는 찬사로도 확인되었다.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블랙독>이 지난 6월 22일과 2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되었다.


심정민 무용 평론가·비평사학자, 한국춤평론가회 회장 | 사진 최재우



힙합 문화 속 힙합 댄스

힙합은 원래 미국 도시의 소외된 흑인들로부터 시작된 음악이자 춤, 낙서이며 또한 패션이지만, 현재는 인종, 국적, 민족을 초월해 전 세계 젊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문화로 부상했다. 힙합에서 ‘힙(hip)’이란 말 그대로 엉덩이를 뜻하며 1960년대의 히피를 표현하는 형용사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최신 유행 사상이나 스타일에 정통한 신세대란 의미도 지닌다. 한편 ‘합(hop)’이란 미국의 흑인이 엉덩이를 경쾌하게 흔들면서 걷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이자, 1950년대 로큰롤이 생겨난 이후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댄스 파티 혹은 그곳에서 추는 춤을 말하기도 하는데 1960년대에는 ‘변칙적으로 추는 춤’을 뜻하는 속어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힙합은 철저하게 젊은 대중의 성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힙합 문화에서 가장 큰 이념은 자유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자유, 아무런 제약 없이 생각을 표현하는 자유, 어떤 정형화된 틀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다. 힙합 문화의 중요한 영역을 차지하는 힙합 댄스 역시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춤으로서 젊은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힙합 댄스는 진화를 거듭해 현재에 이르렀는데, 무대 예술화된 형태로 만들어진 힙합 댄스 시어터 <블랙독>이 그 사례 중 하나이다. 여기서 ‘힙합 댄스 시어터(hiphop dance theater)’는 힙합을 중심으로 해 극적인 전개를 가진 공연예술화된 춤을 의미한다.


거친 세상에 맞서는, 가장 감각적인 춤적 기록

안무 및 연출을 맡은 보티스 세바(Botis Seva)는 1991년 영국 런던 출생으로 힙합·신체극·현대무용 등 다양한 춤 영역을 넘나드는 활동으로 이름을 알려 갔으며, 점차 영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힙합 춤 공연의 선두 주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창작 범주는 상당히 넓은 편으로, 다양한 춤을 비롯해서 연극적 요소, 영상, 텍스트, 디지털 매체 등에 이른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사회적 변혁과 자전적 경험에 근간한 창작을 지향하는데, <블랙독>은 그 대표작 중 하나다.

<블랙독>은 세바가 어린 시절 흑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억압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청년들이 절망과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트라우마와 슬픔, 우울증과 상실의 시간을 겪어 온 모두를 위한 창작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영혼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에 관한 정서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춤적 기록이기도 하다. 초연 이후에도 그렌펠 타워 화재, 코로나19 팬데믹, 흑인 인권 운동 등 사회적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 온 <블랙독>은 특히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난의 여정과 성찰의 순간을 춤 형상으로 펼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마다의 투쟁과 용서, 극복의 이야기

성남아트센터 무대에서 확인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힙합 특유의 즉흥성, 기능성, 현장성에 기대지 않은 채 묵직한 주제 이미지와 뉘앙스를 돋울 수 있도록 통제되고 자제되어 있었다. 배틀 형식의 에너지 넘치는 기교의 향연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다소 익숙지 않을 수 있으나 무대예술로서의 춤 창작에서는 당연시된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족쇄처럼 따라다니는 유년기의 아픈 기억과 성인기의 트라우마가 자아 파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만의 저항, 투쟁, 용서, 극복, 평화의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함을 내비치고 있다. 종장에 이르러 의자 위에서 한 남자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에서는 숭고한 존재마저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리드미컬한 비트에 심박동이나 진동음 혹은 육성(내레이션)을 융해한 소리, 어두운 톤 속에서도 내면의 복잡미묘한 감정의 추이를 예리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반영하는 빛, 젊은 영혼의 자유로움과 안정감 추구를 상징하는 후드 누빔 옷이 어우러져 춤적 형상화를 한껏 돋운다. 이는 작곡 톨벤 실베스트(Torben Sylvest), 조명 톰 비서(Tom Visser), 의상 도슨 라이트(Ryan Dawson-Laight)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배틀 형식에서 벗어나 공연예술화된 힙합 춤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는 <블랙독>은 힙합댄스의 현란한 기교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힙합 댄스의 진화적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블랙독>은 진지하다 못해 어두운 주제 의식에 대한 그만의 안무 및 연출로 무대예술화된 면모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해당 춤 영역에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채로운 동작 개발과 구성적 짜임새에 관해서는 발전의 여지를 남겨 두었으나, 안무가로서 매우 젊은 나이인 서른셋이라는 점에서 예술적 성장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다.

힙합 댄스 시어터 <블랙독>

일시 | 6월 22일(토)~23일(일)

장소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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