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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NART F/W PREVIEW·깊이보기] 발레와 서커스를 넘어선, 무대 위의 ‘혁명’: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

‘동양의 곡예 예술과 서양 고전발레의 만남’. 중국 시안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가 8월 23일~25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국내 초연으로 관객을 만난다. 발레와 서커스의 가장 혁명적인 하이브리드, 중국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서커스 발레의 대표작이 선사하는 강렬한 전율을 마침내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됐다.



서커스, ‘인민의 예술’로 꽃피다

서커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시대부터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해 왔다. 다만 곡예, 줄타기, 광대 퍼포먼스 등을 다채롭게 포함한 근대적 의미의 서커스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20세기 이후 서커스는 공교롭게도 옛 소련을 비롯해 중국, 북한, 헝가리 등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를 가진 국가들에서 크게 발전했다. 가장 큰 이유로 사회주의 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이 서커스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육성한 것을 꼽아야 한다.

소비에트 혁명을 이끈 지도자 레닌은 1919년 서커스를 ‘인민의 예술’로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 서커스가 인기 있는 볼거리를 넘어 애국주의를 고양하고 건전한 국민을 양성한다는 소비에트 정권의 목적에 들어맞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이어져 온 민간 서커스단들은 모두 국영화됐으며 1927년 세계 최초로 전문 서커스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커스 기반 시설 투자가 이뤄졌다.

특히 서커스 학교에서는 동물 조련 대신 체조 테크닉을 사용한 훈련이 주를 이뤘다. 당시 소련에서는 바람직한 신체 문화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집단 체조와 매스 게임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런집단 체조 프로젝트에는 표도르 로푸코프, 이고르 모이세예프 등 발레 안무가들도 참여해 아크로바틱한(곡예적) 동작을 보다 예술적으로 보여 줬다. 반대로 소련 발레는 체조의 영향을 받아 아크로바틱한 리프트와 도약 등을 도입해 테크닉의 발전을 이뤘다. 1956년 볼쇼이 발레단의 런던 공연을 시작으로 소련 발레단들이 서방투어에 나섰을 때 관객들을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이 바로 ‘소비에트 리프트’로 불리는 아크로바틱한 테크닉이었다. 남자 무용수가 여자 무용수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는가 하면 여자 무용수가 남자 무용수에게 거꾸로 매달린 채 움직이는 등의 동작은 당시 서구 발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 Xian Acrobatic Troupe


세계 최정상의 서커스 강국,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원형을 구축한 소련에서 서커스, 체조, 발레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영향을 줬다. 중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에서 서커스를 뜻하는 단어는 ‘잡기(雜技)’인데,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가 다양한 곡예와 기예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으로 처음 칭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국공 내전을 치를 때 당원들을 다독이는 수단으로 잡기를 자주 활용했다. 그리고 1949년 공산당의 국공 내전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수립된 이듬해 중국잡기단이 설립되면서 서커스의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발레의 경우 중국 정부가 1954년 베이징무도학원을 세우고 소련 교사들을 초청해 학생을 길러 낸 것이 토대가 됐다.

다만 중국은 선사 시대 유물에서부터 곡예의 흔적이 나오는 데다 다양한 시대를 통틀어 서커스를 즐겼다는 점에서 자국을 3000년의 역사가 있는 서커스 종주국으로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 내 31개 성(省), 시, 자치구에서 서커스단과 서커스 학교를 운영하는가 하면 전문 공연장을 운영하는 등 세계 최정상의 서커스 강국으로 손색이 없다. 이런 중국의 서커스는 아크로바틱 체조와 공중 곡예를 극대화해 연출하는 데 강점이 있다.

이번에 내한하는 시안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백조의 호수>는 바로 중국 서커스가 보여 줄 수 있는 궁극의 테크닉을 놀라운 예술성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서커스와 발레, 양쪽의 상식을 뒤집는 혁명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Xian Acrobatic Troupe


서커스와 발레의 혁명적 하이브리드, 백조의 호수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원래 2004년 중국군 소속인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광동잡기단)에서 초연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단원인 웨이바오화-우젱단 부부가 1998년 <동양의 백조-머리 위에서 춤추는 발레>란 작품으로 중국군 주최 문예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부부는 기계 체조 선수로 활동하다가 1996년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에 입단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 서커스 단원들 대부분은 어릴 때부터 체조 선수로 육성돼서 기본기가 탄탄하며, 일부는 발레를 배우다가 전업해 표현력이 뛰어나다. 서커스 시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웨이바오화-우젱단 부부처럼 체조와 발레를 전공하다 전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동양의 백조-머리 위에서 춤추는 발레>는 발레 <백조의 호수> 중 남녀 주인공의 파드되(2인무)를 아크로바틱으로 표현한 것이다. 토슈즈를 신은 우젱단이 웨이바오화의 어깨와 머리 위에 한쪽 발끝으로 선 채 아라베스크나 피루에트 같은 발레 동작을 선보였다. 기량이 뛰어난 중국 서커스 단원들은 많지만, 발레와 결합한 웨이바오화-우젱단 부부의 작품은 그동안 본 적 없는 퍼포먼스였다. 이 작품은 이후 2000년 중국의 전국 서커스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데 이어 2002년에는 서커스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제26회 모나코 몬테카를로 국제 서커스 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골든 크라운상을 받았다.

이 작품이 전막의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로 만들어지게 된 것은 안무가 자오밍 덕분이다. 자오밍은 중국의 발레와 현대무용 분야에서 손꼽히는 안무가로, 미국 유학을 다녀와 해외 공연계 사정에도 밝은 인물이다. 그는 웨이바오화-우젱단 부부의 파드되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은 여느 중국 서커스단처럼 다양한 퍼포먼스를 나열식으로 보여 준 뒤 피날레로 <동양의 백조-머리 위에서 춤추는 발레>를 선보였다. 자오밍은 “이 작품을 발레 <백조의 호수> 모티프로 규모를 키워 전 세계에 선보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무가로서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고 훗날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머리 위에서 춤추는‘동양의 백조’

자오밍이 안무 및 연출을 맡은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2년 여 준비 기간을 거쳐 2004년 9월 중국 인민해방군의 제8회 군사공연예술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작품은 ‘백조로 변하는 저주에 걸린 공주와 왕자의 사랑 이야기’라는 원작 발레의 큰 뼈대를 유지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구체적인 줄거리는 동양의 공주가 나쁜 마법사의 저주에 걸리는 것을 꿈에서 본 서양의 왕자가 공주를 찾아오는 여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 여정 안에 다양한 동양 춤을 모티프로 한 군무와 함께 공연 내내 후프와 장대, 공중 곡예, 트램펄린 묘기 등 수십 가지의 서커스 기술이 나오기 때문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작품의 하이라이트로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남녀 주인공의 파드되는 유튜브에서 3000만 회 이상 재생될 정도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 Xian Acrobatic Troupe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초연 당시 군사공연예술제에서 ‘올해의 작품상’ 등 10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중국 인민일보는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의 <백조의 호수>가 서커스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서커스에 영혼을 불어넣었다는 찬사를 받은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은 이후 <서유기> <소오강호> <나비 연인들> 등 스토리, 음악, 춤이 결합한 작품을 잇달아 선보이게 됐다.

2006년부터 해외 공연에 나선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중국에서보다 더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발레 <백조의 호수> 공연은 세상에 많지만, 서커스 발레 <백조의 호수> 공연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발레 지상주의자들에겐 위화감이 느껴질 수 있지만, 일반 관객에겐 이보다 강렬한 <백조의 호수>는 없다. 중국에 발레를 전달했던 러시아에서도 이 작품이 <백조의 호수> 상연사를 새롭게 썼다는 리뷰가 나왔다. 냉전 시대 소련 발레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면, 21세기에 중국 서커스 발레가 세계를 놀라게 만든 셈이다.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은 2019년 조직을 새롭게 정비한 이후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양산백과 축영대의 사랑을 그린 <나비 연인들>의 새로운 버전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백조의 호수>가 더 이상 공연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쉬웠는데,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과 청두 깃발 아크로바틱 예술단 출신 단원들을 중심으로 2019년 새롭게 설립된 시안 아크로바틱 예술단이 리바이벌에 나섰다. 그리고 3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22년 선보인 새로운 <백조의 호수>는 이전보다 풍성해진 서사와 섬세한 미장센을 보여주며 해외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남녀주인공은 각각 체조와 발레에서 서커스로 넘어온 저우지에와 쑨위나가 맡았다. 특히 쑨위나는 랴오닝 발레단 부속 발레 학교와 광동 아크로바틱 예술단에서 각각 3년씩 발레와 서커스를 배워 기량과 표현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커스 발레는 서양 발레의 낭만과 동양 서커스의 스릴을 결합하기 위해 중국에서 만들어진 예술 형식이다. 중국을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 매력을 마침내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게 됐다.


장지영

국민일보 선임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문화스포츠부장을 거쳐 현재 선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공연을 담당하면서 그 매력에 빠졌으며, 지금은 다양한 예술 현장과 정책을 다루는 공연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공연의 생존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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