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가가 평소보다 효과가 좋았네요.”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가 헐크(마크 러팔로)에게 넌지시 다가와 위로한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사상자가 두 배로 늘고 소중한 친구는 추억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블랙 위도우의 따스한 다독임에도 헐크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다”라고 답한다. 분노라는 감정이 변신의 동력이라는 점이야말로 헐크의 치명적 약점이다. 이 약점은 급기야 어벤져스 군단 전체의 급소가 되기에 이른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 감독 조스 웨던 |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헴스워스, 마크 러팔로, 크리스 에반스 외
2015년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초반 장면이다. 영화는 서울 마포대교와 상암동 일대에서 후반 장면을 촬영해서 개봉 이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물론 실제로 어벤져스 군단이 출동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근사한 할리우드 세트장보다는 혼돈의 아수라장에 가깝겠지만 말이다.
영화에서 헐크가 헤드폰을 쓰고서 듣는 아리아가 ‘정결한 여신(Casta diva)’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 1막에서 여제사장 노르마가 부르는 노래다. 타고난 선율 작곡가였던 벨리니에 대해 후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드물게도 귀하고 유려한 멜로디를 지칠 줄 모르는 생산성으로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고 격찬했다. 벨리니 특유의 서정성 넘치는 선율에만 귀 기울이면 얼핏 헐크를 위로하는 달콤한 노래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페라에서 침략자인 로마군 사령관과 사랑에 빠져서 두 아이까지 낳은 노르마는 실은 동족애와 연정 사이에서 깊은 고뇌를 겪고 있다. 그렇기에 사제라는 공적 신분으로는 “신이 격노할 때 로마인들은 피를 바쳐야 할 것”이라고 단언하지만, 반대로 여성으로서는 곧바로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이니 돌아와요”라고 간절하게 탄원한다. 영화에서는 전설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흐른다. 칼라스는 평생 80여 차례나 이 오페라를 무대에서 불렀고 2장의 스튜디오 전곡 음반을 남겼다. 이 때문에 20세기에 이 오페라를 되살린 주역으로 꼽힌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헐크는 오페라의 비극적 여주인공 노르마와 동병상련의 처지다. 헐크 역시 어벤져스의 일원이지만 ‘알몸뚱이 초록색 괴물’이라는 자기혐오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한다. 천재 물리학자 브루스 배너의 또 다른 자아가 통제 불가능한 괴력의 헐크라는 설정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현대적 변용이기도 하다. 헐크는 배너의 인간적 나약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배너는 헐크의 야만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영화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같은 초능력 영웅들이 총출동한 마블 영화 시리즈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2012년 전작 <어벤져스>에서 외계 종족이 적이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적대적인 인공 지능(AI)인 울트론과 맞서 싸운다. 영화 초반부는 AI와 인류의 대결 구도를 다루는 공상 과학(SF) 영화의 기본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인류가 창조한 AI가 정작 충직한 수호자보다는 진화된 대체자를 꿈꾼다는 설정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노르마> 무대에 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 www.metopera.org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영화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만큼 매력적인 악당이 등장하고, 손쉬운 정답보다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질 줄 안다는 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울트론은 창조자인 어벤져스 앞에서 거침없이 묻는다. “너희가 어떻게 고결할 수 있겠어. 모두 살인자들인데.” 전쟁에서 예기치 못했던 민간인들의 희생을 뜻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는 어벤져스 군단을 괴롭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어벤져스는 이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한다. 또한 ‘초능력 영웅도 통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어벤져스의 내부 분열은 이듬해 후속편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만 어디서나 편재하는 AI가 굳이 육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거죽을 걸치려 든다는 설정은 시각적으로 악을 구현해야 하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분히 만화적이다. 하긴 악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화끈한 액션물이 아니라 음산한 공포물로 변할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어벤져스 시리즈는 흥행과 평단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던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전까지 슈퍼히어로 장르는 영웅들이 홀로 힘겹게 세상을 구원하는 ‘단식 경기’에 가까웠다면 이 시리즈를 통해서 합종연횡의 화려한 ‘복식전’으로 거듭났다. ‘초능력 영웅들의 올스타 팀’이라는 매력, 전편과 후속편을 이어 주는 거대한 서사 구조는 이 시리즈만의 남다른 경쟁력이자 차별점이었다. 이 때문에 ‘마블 유니버스’나 ‘마블 세계관’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서부의 총잡이나 도시의 마피아와 마찬가지로 모든 영화 장르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현시점에서 돌아보면 이 영화는 어벤져스 시리즈가 정점에 도달하기 직전의 역동성과 잠재력을 간직하고 있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인피니티 워(2018)>와 <엔드 게임(2019)>의 2부작을 통해서 눈부시게 만개한 뒤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전편과 연결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차별화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버거워진 것이 사실이다. 시리즈의 매력 자체가 족쇄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퇴장 이후 이 시리즈는 뚜렷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한 반복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세상을 거뜬히 구원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초능력 영웅들이 정작 자신들의 앞날은 예견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모든 슈퍼히어로물의 지독한 역설이다.
벨리니 오페라 <노르마>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오로지 칼라스 자신과 싸운다. 칼라스는 1948년 11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노르마>에 처음 출연한 뒤 평생 아흔 번이나 이 오페라를 노래했다. “칼라스의 등장으로 <노르마>도 함께 부활한 것”(박종호 풍월당 대표)이었다. 1954년과 1960년 스튜디오 전곡 음반만 두 차례 남겼고 실황 녹음도 있어서, 지금도 칼라스의 결정판을 놓고서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1954년 음반은 칼라스의 전성기 시절 목소리를 접할 수 있고, 1960년 음반은 테너 프랑코 코렐리와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 등 동료 가수들의 캐스팅이 화려하다.
글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고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 『시네마 클래식』 『모차르트』 『씨네 클래식』 등의 저서가 있다. 다양한 강연과 해설 무대는 물론, 유튜브 채널 ‘클래식 톡’을 통해 클래식과 대중의 간극을 줄여 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진 제공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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