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utterstock
동물과 달리 사람은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다. 또 하나 동물과 식사 방법이 다른 점은 숟가락, 포크, 젓가락 같은 도구로 음식을 입으로 ‘운반’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나 개의 경우엔 주둥이를 음식으로 가져가먹는다. 사람은 왜 도구를 사용할까? 아마도 다른 동물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동물은 날카로운 이빨로 질긴 가죽을 찢어서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의 턱이나 이는 그만큼 강력하지 않다. 음식을 불에 익혀 먹는것도 이가 부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음식 운반 도구를 발전시켰는지, 도구와 음식 문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숟가락, 보편적 식사 도구
사람이 속한 영장류만이 음식을 손으로 먹는다. 그중에서도 사람만이 식사에 도구를 사용한다. 인류도 처음에는 손으로만 음식을 먹었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민족과 부족이 많다. 심지어는 유럽인들도 비교적 최근까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예를들어 16세기 영국 왕 헨리 8세는 손을 깨끗이 씻고 음식을 먹었다. 유럽에서 포크를 누구나 다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0~400년 전이다. 포크보다 숟가락이 훨씬 오래된 식사 도구다. 차이점이라면 숟가락은 액체를, 포크는 고체를 먹는 도구라는 점이다. 포크보다 숟가락의 역사가 더 길다는 것은 액체가 고체보다 손으로 먹기 힘들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헨리 8세는 야채나 옥수수 따위의 곡물과 고기는 손으로 먹더라도 수프와 스튜 같은 국물 요리를 먹을 때만큼은 숟가락을 사용했을 것이다.
액체로 된 음식을 마시는 일 외에도 식사 도구가 태어난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식사 도구의 탄생 근거에 대해 대체로 손이 지저분해지고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깨끗이 씻기만 한다면 손은 도구보다 더 위생적이다. 지저분해져도 식사 뒤 씻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더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화식(火食)에 있다. 불에 금방 익힌 고기는 손으로 먹기 힘들었을 것이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까지 식은 뒤에 먹어야 한다. 하지만 맛에 민감한 인류는 손으로 쥘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울 때 음식이 더 맛있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 꼬챙이나 뼈 따위를 임시변통해 뜨거운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한 임시변통의 도구들은 비정형의 모양이고 또한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인류가 정확히 언제부터, 또 어떤 모양의 식사 도구를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집트 문명을 비롯해 고대 중국, 그리스와 로마, 한국 삼국 시대의 숟가락 유물은 현존한다. 그것은 상아·청동·나무 따위로 만들었고 기다란 자루와 동그란 술날(숟가락에서 둥근 부분의 가장자리)이 결합된, 아주 단순한 형태지만 대단히 효과적이다. 숟가락은 국물 음식, 뜨거운 음식 그리고 낟알로 흩어지는 곡물 따위를 아주 쉽게 떠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익힌 감자나 생선 따위를 썰어서 떼어 낼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기능성으로 가장 오래된 식사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수용소 같은 시설에서 포로나 죄수들에게 숟가락만 주는 이유도 그 기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숟가락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동아시아 등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도구다. 숟가락은 문명권에 따라 차별적으로 나타난 포크와 젓가락보다 더 근본적인 식사 도구인 셈이다. 이는 음식을 먹는 데 포크로 찍거나 젓가락으로 집는 것보다 모아서 뜨는 것이 식사의 근본이라는 걸 일깨워 준다. 인류가 화식을 시작한 뒤로 곡물 요리가 주식이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모아서 떠먹는 것이 왜 근본적인 식사인지 알 수 있다. 곡물은 대부분 딱딱해서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불을 이용하자 딱딱한 곡물이 부드러워졌고, 그것을 물과 결합해 포리지(porridge), 즉 곡물을 갈거나 으깬 뒤 물을 붓고 가열해서 걸쭉하게 죽처럼 끓인 음식이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곡물은 고기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더욱 근본적인 음식이므로 포리지를 먹기 위한 숟가락이야말로 농경문화의 근본적인 식사 도구인 것이다.
어린이가 숟가락으로 포리지 종류의 음식을 먹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빅토르스의 작품. 성경에 등장하는 에서가 렌틸콩 스프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권리를 넘기는 모습을 그렸다 Jan Victors, Esau Selling His Birthright to Jacob for a Pottage of Lentils, oil on canvas, 1653/ The Royal Łazienki Museum in Warsaw
포크와 나이프, 위협적인 식사 도구
서양 식탁 위의 필수품인 포크는 생각보다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유럽에서 포크가 처음 등장한 건 11세기 이탈리아로 16세기부터 일반화되었다. 그 배경에는 파스타의 등장이 있다. 스파게티 같은 국수형 파스타는 면을 돌돌 말아 쉽게 먹을 수 있는 포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스타가 곧바로 유럽 전역으로 퍼진 건 아니어서 파스타를 먹지 않는 나라에서는 여전히 포크를 사용하지 않았다. 파스타를 먹지 않는 알프스 산맥 북쪽 사람들은 포크가 ‘악마의 삼지창’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손가락을 두고서 굳이 포크를 사용하는 것은 허세라는 편견도 있었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사탕과자용 포크가 있었지만, 포크로 과 자를 찌르는 행위가 천박하다는 이 유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포크가 편리하다는 것은 이탈리아 밖의 유럽에서도 곧 증명되었다. 포크는 파스타를 입으로 옮기는 데만 효과적인 것이 아니라 고기를 고정하는 데도 매우 적절함을 깨달은 것이다. 포크가 보편화되기 전 유럽인들은 고기를 먹을 때 나이프 두 개를 양손에 들었다. 하지만 나이프는 고기를 누르는 지점이 하나이므로 자를 때마다 고기가 흔들린다. 포크는 누르는 지점이 두 개이므로 안정적으로 고기를 붙들 수 있다. 처음에는 포크의 갈퀴가두 개였다. 하지만 갈퀴 세 개가 고기를 좀 더 안정적으로 고정할 수 있다. 포크는 고기를 고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찍어서 입으로 옮기는 기능도 해야 한다. 그러려면 갈퀴가 더 많을수록 좋으므로 종국에는 4개로 늘어났다. 포크를 사용하기 전에는 나이프가 고기를 자르고 운반하는 두 가지 기능을 했다. 그러려면 끝이 뾰족해야 하는데 그것은 위협적이다. 운반 기능을 포크가 전담하자 나이프는 자르기만 하면 되므로 그 끝이 부드럽게 변했다. 이는 식사 자리를 좀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만큼 나이프를 사용하는 서양의 식탁에서는 위험이 상존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날이 세 개인 포크(위)와 칼끝이 부드러워진 나이프(아래) © Cooper Hewitt, Smithsonian Design Museum
젓가락, 부드럽고 우아한 식사 도구
고기를 먹는 서양의 음식 문화는 포크와 나이프를 낳았다. 반면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음식 문화는 숟가락과 젓가락의 사용을 촉진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밥은 숟가락으로, 반찬은 젓가락으로 먹었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부터 점차 밥 역시도 젓가락으로 먹기 시작했다. 밥이 점성이 좋아져서 젓가락으로도 집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숟가락은 점차 국물을 떠먹는 용도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쌀과 밀로 만든 국수가 발달하면서 젓가락은 마침내 숟가락을 밀어내고 동아시아 식탁의 주도적인 식사 도구로 자리 잡았다.
포크와 나이프의 문화는 음식을 자르고 찌르는 행위를 강요한다. 반면에 숟가락과 젓가락의 문화는 음식을 결코 베거나 찌르지 않는다.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문화권의 식탁에는 고기를 비롯해 모든 음식이 잘게 잘려서 나온다. 잘게 썰어 만든 음식을 젓가락으로 능수능란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입으로 운반하는 모습은 서양인에게 대단히 우아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일본 여행 경험을 담은 책 『기호의 제국』에서 포크와 나이프의 문화를 폭력적이고 약탈적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젓가락은 음식물을 나누기 위해 서양의 도구처럼 자르거나 찌르는 대신 분리하고 헤쳐 놓거나 흩트린다. 젓가락은 음식물에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중략) 이런 점에서 젓가락은 나이프보다는 손가락의 원시적인 기능에 더 가깝다.” 원시인이 손가락을 사용해 음식을 먹을 때보다 유럽인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먹을 때가 더욱 폭력적이라는 의미다.
18세기 독일의 스푼 © Cleveland Museum of Art
짝을 이루는 수저
젓가락을 쓰는 문화권에서도 차이가 조금씩 있다. 한국만이 금속 젓가락을 쓰고 나머지 나라들에서는 주로 나무젓가락을 쓴다. 한국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쓰라는 유교의 예절을 지켰기 때문이다. 유교 경전에 따르면 밥은 반드시 숟가락으로 먹고 반찬은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친다.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전수받은 한국은 중국보다 더 근본적인 유교 국가여서 그 법도를 최근까지 지켰다. 반면에 중국인들은 아주 오래전에 그 법도를 버렸다. 명나라를 방문한 조선 선비들은 중국인들이 밥을 먹을 때에도 젓가락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밥그릇을 입 근처로 가져가 먹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비는 절대로 밥그릇을 드는 법이 없으며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것도 상스러운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밥그릇을 들어 얼굴 근처로 가져가는 자신들의 식습관과는 달리, 조선인들이 얼굴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가져가 먹는 모습을 보고 마치 개처럼 먹는다고 폄하했다.
명나라 시대 도자 숟가락. 자루가 짧고 술날과 비스듬한 각도로 결합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이처럼 숟가락과 젓가락은 각자의 임무가 다르기 때문에 언제나 짝을 이루어 밥상에 올라간다. 그 결과 숟가락과 젓가락의 디자인은 통일되어야 한다. 반면에 주로 젓가락을 사용하고 국물 요리를 먹을 때에만 숟가락을 사용하는 중국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의 디자인이 분리 발전했다. 중국 숟가락은 그야말로 오직 국물용이므로 깊이 파여서 더 많은 액체를 담을 수 있다. 또 술날과 자루가 국자처럼 꺾여서 만나므로 용기 속 국물을 뜨기 더 쉽다. 한국 숟가락은 밥과 국물 두 가지를 담으려다 보니 절충형으로 디자인되었고 국물을 떠먹기에는 그 깊이가 좀 얕다. 또 술날과 자루가 수평으로 만나기에 그릇이 깊고 국물이 적으면 뜨기가 불편하다. 왜 이런 불편이 개선되지 않을까? 젓가락이 숟가락의 디자인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즉 ‘수저’라는 짝의 문화가 수저의 디자인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밥상에 같이 놓일 일이 없는 중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각자의 기능에 맞게 진화했다. 그러다 보니 재료도 다르다. 젓가락은 나무고 숟가락은 도자기다. 요즘 중국의 숟가락은 플라스틱이 많다. 반면에 연인처럼 밥상에 반드시 짝을 이뤄 놓이는 한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그 모양이 이질적이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재료도 똑같아야 한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 젓가락만 금속인 이유는 역시 금속인 숟가락과 짝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놋쇠(유기)였고 요즘은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중국과 서양 숟가락의 손잡이는 기능적이다. 중국 숟가락은 손잡이가 짧고 국자와 비슷한 각도로 디자인되어서 실용적이다. 서양 숟가락은 잡기 쉽게 손잡이가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고 술날과 자루가 만나는 지점이 율동적이다. 반면에 한국 숟가락의 손잡이는 뻣뻣하게 길기만 하다. 이는 기능적으로 디자인된 것이라기보다 기다란 젓가락과 통일되어야 한다는 형식적이고 미적인 요구를 따른 것이다. 포크가 생기자 나이프의 날카로운 끝이 부드럽게 변했다는 것은 포크와 나이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숟가락과 젓가락도 마찬가지로 짝을 이루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디자인된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문명권의 음식을 언제든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포크와 나이프와 젓가락을 누구나 익숙하게 사용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유럽인들이 젓가락을 어색하게 사용했지만 요즘에는 동양인만큼 잘 다룬다. 인도처럼 손으로만 음식을 먹는 문화권에서도 점점 더 도구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에게 음식 운반 도구란 필연적인 것이다. 음식을 손으로만 먹으면 그 다양성이 풍부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단원풍속도첩> 중 새참, 18세기. 새참을 먹는 남자가 그릇을 바닥에 두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시대 청동 수저. 숟가락의 자루가 매우 율동적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글 김신 디자인 저널리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월간 <미술공예> 기자를 거쳐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2011~13년에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다. 2014년부터 칼럼니스트로 독립해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Comentar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