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 감독 브래들리 쿠퍼 출연 브래들리 쿠퍼, 캐리 멀리건 외 | 사진 제공 넷플릭스
1943년 11월 14일 일요일 아침, 25세 청년 지휘자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당초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할 예정이던 거장 브루노 발터가 독감으로 무대에 설 수 없으니 대타(代打)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연주회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반나절 남짓. 리허설도 없이 카네기홀 무대에 오른 이 청년의 활약상을 뉴욕타임스가 대서특필하면서 ‘스타 탄생’의 신화가 시작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첫 마에스트로가 된 이 청년이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이다.
불안했지만 위대했던 삶의 단면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Maestro)>은 인기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곡가이자 뉴욕필의 지휘자였던 번스타인의 실화에 바탕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미덕이 적지 않다. 우선 분장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와 <스타 이즈 본>의 연기파 배우인 브래들리 쿠퍼는 길게는 5시간에 이르는 특수 분장을 통해서 번스타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와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으로 이미 두 차례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던 일본계 특수효과 아티스트이자 조각가 가즈 히로가 이 영화의 분장을 맡았다. 두 수상작이 보여 주듯이 가즈 히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극사실주의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도 어쩌면 유대인이었던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매부리코일지 모른다. 유대인에 대한 비하적 표현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번스타인의 유족들이 옹호 성명을 발표하면서 자연스럽게 논란이 잦아들었다.
영화에서 쿠퍼는 주인공 번스타인 역은 물론이고 연출·제작, 공동각본까지 ‘1인 4역’을 도맡았다. 당초 마틴 스코시지와 스티븐 스필버그도 연출에 관심을 보였지만 공동 제작자로 남았고 결국 쿠퍼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스타 이즈 본> 이후 쿠퍼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음악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급하게 전화를 받은 번스타인이 침대에서 일어나 곧바로 카네기홀에 입성하는 초반 장면부터 쿠퍼는 ‘초보 감독’답지 않은 화려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침실이나 식탁 같은 일상적 공간과 무대의 경계를 지우는 연출 방식은 삶과 예술이 하나이기를 원했던 번스타인과도 어울리는 설정이다. 번스타인의 곡은 물론,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도 흘렀던 말러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까지 번스타인이 작곡하거나 지휘했던 음악들이 넘실거린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정적 미덕을 꼽자면 아마도 고증일 것이다. 흡사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번스타인의 말과 행동, 무의식적 습관까지 스크린에 투영했다. 온몸을 뻗으면서 춤추는 듯한 특유의 ‘만세 동작’으로 말러의 교향곡 ‘부활’을 지휘하는 모습도 고스란히 되살렸다. 실제로 번스타인은 20세기 후반 말러 재조명의 주역이었다.
개봉 당시에는 쿠퍼와 번스타인의 일치율이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고증의 미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참여하는 안무가 제롬 로빈스, 번스타인의 작곡 스승인 애런 코플런드까지 1940~50년대 뉴욕 예술계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이다. 영화 초반부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이 장면에서 번스타인은 로빈스를 위해서 발레곡 <팬시 프리(Fancy Free)>를 작곡하고, 작곡 스승이자 선배였던 코플런드와 피아노 이중주로 연주한다. 실제로 ‘팬시 프리’는 1944년 뮤지컬 <온 더 타운(On the Town)>으로 다시 만들어졌고 1949년 진 켈리와 프랭크 시나트라 주연의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됐다. 영화 후반부 말러의 교향곡들이 거장이 된 번스타인을 보여 준다면, 초반부에 나오는 <온 더 타운>의 삽입곡들은 자유분방한 청년 시 절을 상징한다.
영화는 번스타인의 청년과 노년 시절을 넘나드는 편집 방식을 택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청년 시절은 흑백 화면으로, 노년은 컬러로 각각 구분했다. 실제로 번스타인의 활동 시기는 흑백에서 컬러 화면으로 넘어가는 기간과 겹친다. 관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지만, 실은 또 하나의 반전 카드가 숨어 있다. 번스타인은 여배우 펠리시아(캐리 멀리간)와 결혼해서 세 아이를 기르는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했지만, 그 이면으로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초반부에 간략한 암시 정도로 언급되던 번스타인의 이중성은 후반으로 가면서 드라마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슬픈 가족극이기도 하다. 평생 남편을 감내하며 살았던 아내 펠리시아 역시 결국 폭발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고 인정하다 보면 그래. 당신 진심은 그런 거야. 혼자 늙어 죽기 싫으면 조심해, 게이 영감.”
성(聖)과 속(俗),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이성애와 동성애는 평생 번스타인의 내면에서 충돌하고 공존했던 주제들이었다. 번스타인에 대한 이전 영상들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에두르거나 간략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도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분명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도 영화는 여전히 스필버그적인 화해와 스코시지적인 파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지 못한 채 자꾸 머뭇거리고 멈춰 선다. 영화는 “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대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는 자막으로 출발한다. 번스타인의 지론이었던 이 문구는 실은 번스타인 자신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아쉬움은 극도로 모순적이었던 번스타인의 삶 자체가 만든 것이기도 했다.
말러 교향곡 전곡
레너드 번스타인(지휘), 뉴욕 필하모닉, 소니 클래시컬, 1960~1967(CD)
레너드 번스타인 이전에도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거나 녹음한 지휘자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녹음하는 대장정을 완주한 지휘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평생 두 차례 전곡 음반을 녹음했고, 영상까지 더하면 세 번으로 보기도 한다. 이 가운데 뉴욕 필하모닉 음악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인 1960년대 완성한 첫 번째 전곡 음반이다. 보통 성숙미나 완성도를 기준으로 후기 녹음들을 윗길로 평가하지만, 이 음반에선 무엇보다도 번스타인의 들끓는 에너지와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뉴욕을 걸을 때 배경 음악으로도 어울린다.
글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지휘자 사이먼 래틀과 바렌보임의 전기를 번역했고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 『시네마 클래식』 『모차르트』 『씨네 클래식』 등의 저서가 있다. 다양한 강연과 해설 무대는 물론, 유튜브 채널 ‘클래식 톡’을 통해 클래식과 대중의 간극을 줄여 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사진 제공 넷플릭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