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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옆 영화관] 영화 <라이즈>: 넘어지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올라갈 수 있다

  • 작성자 사진: artviewzine
    artviewzine
  • 3월 5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3월 6일

오래전이다. 아이가 서너 살 정도였을까, 겨울 한밤에 동네 편의점을 갈 일이 생겼다. 아이가 따라 나섰다. 손을 잡고 같이 걷다가 아이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꽤나 아파 보였다. 집으로 바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아이는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편의점에 가서 과자를 사겠다는 목표가 무산될 수 있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넘어져서가 아니었다. 어른이 되려면 앞으로 숱하게 넘어지고 차이고 힘겹게 일어나야 할 텐데 그 과정을 겪어 나가야 할 아이가 안쓰러웠다.

영화 <라이즈>


살다 보면 시련과 마주하게 된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 <기생충>2019 속 기택(송강호)이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고 말하는 장면에 다들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하지만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프랑스 영화 <라이즈>(2022)는 그 진부하나 예외가 많지 않은 인생 법칙을 무용을 통해 다시 강조한다.


머리 대신 ‘몸 쓰는 사람’의 성장통

<라이즈>의 주인공 엘리즈(마리옹 바르보)는 발레리나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공연에서 착지를 잘못 해 발목뼈에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는다. 공연 직전 연인 쥘리앙이 다른 여자와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받은 충격이 영향을 줬으리라. 몸과 마음을 모두 다친 엘리즈는 더 충격적인 상황에 처한다. 의사는 발목 부상이 고질적이라 “포인(Pointe) 동작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진단과 함께 수술을 권한다. “수술하면 2년 정도 운동할 수 없다”는 말이 더해진다. 엘리즈는 26세다. 2년 쉬면 다시 무대에 돌아오기 힘든 나이가 된다. 실연도, 부상도, 수술도 엘리즈의 인생 계획표에는 없던 것이었다.

엘리즈는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변호사인 아버지는 엘리즈를 위로하지 않는다. “내가 이래서 법 공부하랬잖아… 몸 쓰는 건 이래서 문제야”라며 타박을 먼저 한다. “몸보다 머리 쓰는 일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 엘리즈의 가슴을 찌르고 마음에 상처를 쌓는다.

영화는 손 하나가 오른쪽으로 우아하게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용수 동작이라는 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엘리즈가 시련을 이겨 내고 남다른 비상을 해낼 거라 암시하는 대목이다. 결말이 일찌감치 예고됐다고 재미가 없는 영화는 아니다. 엘리즈의 힘겨운 인생 행보와 성장통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엘리즈는 아버지 말대로 머리 대신 몸을 쓰는 사람이다. 발목이 망가졌으니 더이상 몸으로 춤이라는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는 전담 안마치료사의 도움을 받으며 재활을 꿈꾼다. 친구와 함께 예술가들을 위한 펜션에 머물며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된다.

엘리즈는 다친 후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본다. 그는 발레에 대해 회의감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어려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작한 발레는 엘리즈에게는 꿈과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클래식 발레에선 ‘여자는 끔찍한 비극의 운명처럼 묘사’된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는다. 클래식 발레 속 이야기는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어졌으니 여자를 수동적인 비련의 주인공으로만 묘사할 만도 했다.

엘리즈의 자각은 함께 화보 촬영을 하던 친구의 입을 통해 확인된다. 친구는 신랑 앞에 신부가 무릎 끓는 모습으로 자세를 요구하는 사진가에게 거칠게 항의한다. 어린 여자가 남자를 숭배하는 듯한 포즈가 나쁜 고정관념을 전파한다는 이유에서다. 엘리즈가 클래식 발레에 비해 파격적인 내용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하는 현대무용에 이끌리는 건 생각의 변화와 관련 깊다.


아픔을 딛고 통념과 편견을 깨다

엘리즈는 펜션에서 현대무용을 접한다. 발목이 여전히 불편한 탓에 그저 죽은 듯 쓰러진 동작을 취하며 현대무용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무대에 다시 서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통념과 편견을 떨쳐 낸다. 엘리즈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수술 없이 다시 무대에 선다. 클래식 발레보다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강조하는 현대무용을 접하면서 발목은 자연스레 치유된다. 전담 안마치료사의 말처럼 현대의학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항상 정답을 제시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엘리즈는 몸으로 증명한다.

엘리즈는 책 읽는 ‘문화인’은 강조하면서도 발레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놓기도 한다. 아버지는 엘리즈의 발레 초연조차 보러 오지 않았으나 엘리즈가 참가한 현대무용 공연을 보고선 눈물을 흘린다. 머리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감동을 딸의 몸이 빚어내는 장면을 마주하고서다. 책, 곧 지식과 지성만 중요하게 여기던 아버지는 무용이라는 문화의 중요성을 딸이 재활 후 오른 무대를 통해 깨닫게 된다.

영화 원제는 ‘En corps’다. 모두 함께라는 뜻이다. 엘리즈는 홀로 일어서지 않는다. 주변의 도움과 배려로 다시 일어서게 된다. 펜션 주인은 히말라야를 정복한 첫 여성 등반가의 말 “바닥까지 떨어져 봤기에 이렇게 높이 오를 수 있었다”를 인용하며 엘리즈를 격려한다. 현대무용단을 이끄는 유명 안무가 호페쉬 쉑터(쉑터 본인으로 출연한다)는 “약한 건 새로운 초능력이야”라는 말로 엘리즈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발목을 다쳐 무대에 설 수 없는, 예전보다 연약한 존재가 됐다는 자괴감을 깨 준 거다. 무엇보다 엘리즈는 무용단원들과 함께 춤을 추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 낸다. 누군가 손을 내밀고 함께해 주었기에 엘리즈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춤에 대한 영화이니 출연자들의 몸동작이 눈길을 끈다. 발레 공연으로 시작해 길거리 댄스 배틀을 보여 주다가 현대무용의 아름다운 군무를 선사한다. 이스라엘 출신 세계적인 안무가 호페쉬 쉑터가 안무를 맡았다.

엘리즈가 튀튀와 토슈즈를 착용한 후 발레를 하던 모습은 트레이닝복에 스포츠 양말을 신고 현대무용을 연습하는 장면으로 자연스레 전환된다. 쉑터의 섬세한 안무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연출이다. 특히 엘리즈가 동료들과 바닷가에서 서로 손을 잡고 군무를 추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춤은 무대에 박제된 예술이 아니라 자연, 즉 세상과 더불어 공존하는 무엇이라고 역설하는 장면이다. 쉑터는 신작 <꿈의 극장>을 3월 14일과 15일 성남아트센터에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그는 2023년 국내 언론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20년가량 세계 정상을 유지한 비결로 “작품을 만들 때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다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꿈의 극장>은 영화 <라이즈>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의 ‘몸짓 세공술’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로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참, 오래전 겨울밤 넘어져 무릎을 다친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마득하게 잊고 건강하게 자라 잘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그날 아픔을 참고 일어나 편의점에 갔기에, 그래서 원했던 과자를 손에 넣고 달콤한 맛을 보았기에 고통은 아예 잊어버린 게 아니었을까.

<라이즈>의 안무를 맡은 호페쉬 쉑터의 신작 <꿈의 극장>은 3월 14일, 15일 성남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한국일보 입사 후 편집부와 사회부, 국제부 등을 거쳐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 신문에디터로 일했다. 2004년부터 영화를 취재해 왔으며, 영국 서식스대 대학원에서 영화학을 공부했다. 저서『질문하는 영화들』『말을 거는 영화들』, 역서『할리우드 전복자들』로 영화를 사랑하는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편, 뉴스레터 ‘영화로운’으로 매주 구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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