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 2] 호페쉬 쉑터의 <꿈의 극장>: 무의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다
- artviewzine
- 4월 15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6일
3월 14일(금) 오후 7시 30분, 15일(토) 오후 3시 |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꿈이라기보단 기억 같다. 머릿속에 작은 파편처럼 박혀 있던 언젠가의 기억을 한데 꺼내어 필름 조각 이어 붙이듯 기워 냈다. 지난 3월 성남아트센터를 찾은 <꿈의 극장>에서 호페쉬 쉑터는 무의식이나 꿈과 마찬가지로 미지의 숲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다. 겹겹의 어두운 커튼을 걷어 내면 세상에 관한 경험의 조각들이 재생된다.
글 윤대성 월간 댄스포럼 편집장

웅성웅성 들뜬 객석 사이를 지나온 한 남자가 훌쩍 무대로 올라선다. 아래로 푹 꺼진 오케스트라 피트를 월담하듯 넘어서, 무대를 가로 막은 검은 커튼 너머를 유추하듯 유심히 들여다본다. 낯선 공간에 들어서는 듯한 긴장감으로 경직된 뒷모습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커튼을 살짝 들추어 무의식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빼꼼 열린 좁은 틈에서의 춤은 현실 세계와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기묘한 감각을 안긴다. 이후로도 무대는 다 열리는 법이 없다.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같은 여러 겹 커튼을 정교하게 닫았다 열었다 하며 이쪽저쪽으로 만들어지는 틈 뒤에서 오만 가지 인생사를 흘려보낸다. 관객은 어둠 속에 가려지고 들춰지는 깊은 기억들, 현실 세계의 요약판을 문풍지 구멍으로 보듯 관음증적 시선으로 응시하게 된다. 그런데 무용수조차 ‘보는’ 사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최초 무의식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 남자처럼, 그들은 중간중간 정지한 뒷모습이 되어 기억을 응시한다.
계몽주의 성경이라 불리는 『백과전서』 권두화에는 베일에 꽁꽁 싸인 채로 빛을 발하는 진리의 여신이 중앙에 서 있다. 사람으로 표현된 이 성은 그 베일을 벗겨 세상에 명료한 진리를 드러내려 한다. 그런데 <꿈의 극장>은 우리 삶을 선명하게 단정할 수 없는 심연으로 바라본다. 이성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연, 은폐된 소용돌이 안으로 천을 한 꺼풀씩 걷어 낸다. 세상의 수많은 대립하는 것들이 이미지 파편으로 무대를 스쳐 가는 건 그래서다. 질서와 혼돈, 실재와 허상, 토대와 심연, 공포와 환상, 나와 타자(他者),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가의 초정밀 세공이 낳은 수준작
호페쉬 쉑터는 음악적 스펙트럼이 넓다. 록 스타를 꿈꾸던 드러머가 안무가로 전향했으니, 귀마개를 나눠 줄 정도로 강렬한 록 비트는 오히려 놀랄 일이 아니다.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은 몰리 드레이크의 잔잔한 올드 팝 ‘아이 리멤버’가 흘러나올 때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라) ‘너’와 ‘나’였다”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십자가를 그리듯 두 팔을 뻗고 선 동작이 ‘나 홀로 어깨동무’로 보이면서 군중 속에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고독으로 다가온다.
마이크를 든 한국인 무용수가 “함께 춤춰요!”라면서 관객을 일으켜 세울 때는 상황이 정반대다. 소규모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삼바 혹은 살사(분위기에 취해 장르가 가물가물하다)에 맞춰 객석의 1천 명 넘는 관객이 함께 여유로운 선율에 몸을 맡길 때에는 하나 되는 연대와 친근함이 차오른다. 그래서, 너와 나는 다시 ‘우리’인가? 90분 뒤, 무용수들은 각자의 자리에 멀찍이 서서 완전한 정적 속에서 몸을 움직인다. 한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함께는 아니다.
어둠이 모두 걷힌 자리에는 화려한 주름이 멋스러운 밝은 커튼이 또 다른 세계를 향한 문처럼 남아 있다. 무용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본다. 그 너머에는 무의식을 덮은 베일을 완벽히 걷어 내 더 깊어진 심연이자 혼돈, 혹은 출구 밖 현실이 자리하고 있을 테다.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울림이 깊다.
객석을 떠날 때면 한 문장이 맴돈다. 정교하다! 무려 90분 동안 정교하다! 호페쉬 쉑터는 춤과 음악뿐 아니라 커튼 조작, 톰 비저의 훌륭한 조명 등 공연 요소를 완벽한 하나로서 초정밀하게 세공했다. 그가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암전 표현이 빼어난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도 작품 감상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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