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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토크] 작가 김남표: 본질을 향한 여정

  • 작성자 사진: artviewzine
    artviewzine
  • 4월 15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일 전

찌를 듯 깎아지른 절벽과 몰아치는 파도. 격렬하게 생동하는 자연의 한 자락이 마치 실재하 는 풍경처럼 주변을 감싼다. 캔버스 위에 치밀하게 쌓아 올린 궤적들은 회화의 본질을 향한 김남표 작가의 치열한 탐구의 기록이다. 그 지난한 여정의 사이마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또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기억하는 회화란 어떤 모습이냐고.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소통전략부 과장 I 사진 최재우


김남표의 현장은 고유한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이다. 집단 ‘막’의 이름 아래 거친 재개발 구역 현장을 누비며 공동작업에 몰두하던 젊은 시절부터 스튜디오를 벗어나 제주 바다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나든 지금까지, 그에게 작업은 곧 현장을 의미했다. 김남표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제목인 ‘Instant Landscape’ 시리즈와 히말라야 작업들은 작가가 직접 경험한 날것의 전율을 집대성한 작업이다. 5월 16일부터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진행되는 <김남표: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는 그가 직접 포착하고 구현한 장대한 서사의 기록이다.

“산과 바다는 회화의 기본이자 시공을 초월해 의미를 지니는 대상이지만, 막상 이 작업들을 함께 놓아 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반달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구성이 제게도 의미가 커요. 친숙한 소재지만 그 안에서 김남표라는 작가의 성향과 회화의 본질을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Instant Landscape’ 연작 중 제주 바다를 포함한 자연의 모습은 즉흥성과 영속성이 공존하는 존재다. 대상 자체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 온 풍경이지만, 그 결과물은 계획이나 밑그림 없이 그려 내는 즉흥의 토양에서 탄생한다. 이는 곧 불안정한 현장성 속에 순간의 표현을 포착하는 작가의 성향과도 연결된다.

“저는 ‘미술은 성향을 드러낸다’고 생각해요. 제 작업의 큰 축이 즉흥성이라는 건 저 역시 그런 성향을 지녔다는 의미죠. 작업 현장은 언제나 계획을 벗어난 일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돌발성과 즉흥성이 좋은 자극이 됩니다.”

김남표의 현장 중 안나푸르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존재 그 자체로 압도하는 히말라야의 까마득한 절경, 2023년 ‘박영석 대장 3차 수색 프로젝트’에 작가로는 유일하게 히말라야 등반에 동행한 뒤 작품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등반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그는 이 현장에서 어떤 여정과 영감을 경험했을까.

“힘들었죠. 눈사태를 만나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하고…. 또 막상 현장에서 산을 오르다 보면 고산병 때문에 그 위에선 작업이 불가능해요. 연필로 간단한 스케치만 기록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귀국 후 보고전을 찾은 전문 산악인들이 제 작품을 보며 마치 실제 현장에 선 듯 등반 포인트를 회고하는 모습에 작업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심이 됐어요. 평생 바라봤던 산을 이곳에서 만나니 좋다는 말이 큰 보람이 됐죠. 등반 과정에서 몇 주간 함께했던 현지 포터들의 모습도 안나푸르나의 존재만큼 생생합니다. 고작 몇 만원 일당에 수십 킬로그램 짐을 이고, 심지어 슬리퍼를 신고 산을 오르던…. 그저 생업을 해 내는 덤덤한 표정, 피부에서 산의 질감이 느껴지던 그분들을 다음 기회에는 더 제대로 그리고 싶어요.”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해 파리 시테 레지던시(Cité internationale des arts) 입주 당시 작업한 수채화 드로잉 시리즈도 만날 수 있다. 여유롭게 파리를 만끽하는 대신, 현지 동료들이 ‘드로잉 머신’이라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밤낮으로 몰두한 420여 점 결과물 중 일부다.

“만약 제주와 안나푸르나 작업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힘들었겠죠. 현장에서 단련된 감각의 이어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저는 작업을 할 때 제일 편안하거든요. 대놓고 ‘쉬자’고 생각하면 대체 뭘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어쩌면 작업 안에 저만의 쉼이 있는 거죠.”


© 최재우

모든 표현은 손끝으로부터

김남표의 작품은 자연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시공간을 유영한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대신 때로는 호랑이와 얼룩말이 등장하는 판타지, 때로는 구한말과 오후 5시의 해 질 녘 감성을 넘나든다. 파스텔에서 유화로, 수채화에서 VR로 여러 재료와 주제를 오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렘’이란 단어를 좋아하지만, 오래 작업하다 보면 으레 설렘은 사라져요. 그래서 ‘설렘이 없어도 설렘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재료와 주제를 세팅하죠. 언젠가 ‘감각을 낯선 오지에 세운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제 감각은 새로움을 만나야 예민하게 반응해요. 현장의 즉흥성과 불확실성, 각기 다른 재료와 주제 모두 창작을 위한 새로운 자극이 되어 줍니다.”

붓 대신 면봉이나 휴지, 나이프, 손가락 등 다양한 도구의 활용도 작가가 낯선 재료와 환경을 매개로 감각을 찾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시그니처인 면봉 작업 역시 우연히 아내의 화장대에 놓인 면봉 상자를 바라보다 ‘저렇게 붓이 많다면 좋겠다’고 떠올린 데서 시작됐다.

“붓 대신 나뭇가지로 그리는 작가도 있듯이 제각기 현장에 맞는 방식이 필요하니까요. 유화를 그린 붓은 빠르게 잘 닦지 않으면 굳어 버리는데, 야외에서 실경을 그리다 보면 차분하게 도구를 닦는 행위가 불가능한 상황이 많거든요. 그래서 면봉을 도구로 사용하게 됐죠. 면봉의 중간 부분이 나무인지, 약간의 탄력이 있는 플라스틱인지에 따라 표현 효과도 달라서, 목적에 따라 구분해 사용해요. 휴지로 넓은 여백을 채우고, 나이프로 거친 마티에르를 표현하고, 면봉으로 세밀한 터치를 이어 가죠.”


© 최재우


재료의 특성과 교감하고 캔버스 위에 구현하는 전 과정은 김남표의 손끝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목탄과 파스텔, 인조털과 같은 소재들은 아주 작은 자극에도 쉽게 변화하고 그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사랑하는 불안정한 즉흥성과 닮았다.

“파스텔은 손으로 비벼 가며 작업하는데 장시간 하다 보면 지문이 희미해지곤 해요. 캔버스 전체에 융을 사용한 작업은 바늘 스크래칭으로 하나하나 인조털을 세우기를 반복하죠. 담요의 결을 비비듯 살짝이라도 물리적인 압력이 생기면 순식간에 원복이 돼요.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몇 달이 걸린 융 작품을 싹 문질러 놓은 기억이 떠오르네요(웃음).”


김남표, <Instant Landscape - Aewol sea #10>, 193.9×259.1㎝, Oil on canvas, 2025


그림과 회화의 경계에서

30여 년의 화업을 이어 오는 동안 김남표는 회화의 본질을 찾아가는 자신만의 묵묵한 여정을 지속해 왔다. 갤러리와 대중의 취향에 순응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회화 적 정체성을 찾는 데 집중한다. 급변하고 또 팽창하는 미술 시장 속에서 단기간의 유행에 편승해 작업하다 정작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잃어 가는 젊은 작가들의 모습은, 특히나 위험한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미술 시장은 넓어졌는데 진짜 미술 이야기는 사라지고 있어요. 제가 좋아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단어가 회화거든요. 무엇이든 그림은 될 수 있지만, 모든 그림이 회화는 아닙니다. 작업의 내면에 어떤 개념들이 존재할 때 비로소 그림은 회화가 되죠. 회화적인 조건에 대해 정해진 룰이 있지는 않더라도, 늘 그런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며 그려야 해요.”

즉흥성을 사랑하는 김남표 작가지만 작업에 대한 큰 줄기의 계획은 존재한다. 히말라야를 한 번 더 오르는 것, 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의 탄자니아 미술센터 설립 프로젝트 연계 작업도 있다. 안나푸르나에서 포터와 세르파를 그렸던 시간이 탄자니아의 아이들과 대자연 속 동물들로 이어지는 순환 자체가 그에게는 작업의 흐름이고 서사다.

“어쩌면 이제야 미술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한때 ‘닭살이 돋는다’는 의미의 ‘Goose bumps’가 제 작품의 부제였듯, 피부의 반응은 머리로 의식하는 것과 다르거든요. 직접 바라보고 체험하면서, 머리보다 피부로 느끼는 제 성향이 미술이 될 수 있도록, 그에 충실한 계획들을 세우고 있죠.”

다채로운 탐구와 도전 중에는 NFT와 VR 등 수년 전부터 등장한 디지털 현장의 경험과 관찰 역시 포함된다. VR 디지털 드로잉 작업을 포함, 파도처럼 몰려왔다 사라지는 디지털의 물결을 마주한 경험은 NFT 예술작품과 창작의 접근법 등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가는 기회가 됐다고 작가는 설명한다.

“AI를 사용한 창작이건 온전히 사람의 작업이건, 결국 한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겠죠. 이를 위해서는 집단의 의견만이 존재하기 보다는 서로의 다양성을 배려하는 사회, 저마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해요. 예술도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의 오리지널리티가 사라지고 집단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사회라면 예술의 앞날 역시 비관적일 테니까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매체나 트렌드는 변화하더라도,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예술의 본질과 고유성을 지켜가는 것은 오롯이 작가의 몫이다.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선보이는 김남표의 전시 <누가 회화를 두려워하랴>는 그만의 시선을 통해 동시대 예술의 역할과 회화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모든 이들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더라도, 저마다의 오리지널만이 서로 다른 무언가를 포착하고 형상화할 수 있어요. 회화의 정의와 본질은 제게도 아직은 어려운 화두지만, 이 전시가 그 질문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제 그림이 회화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뇌며 답을 찾아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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