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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텍스트힙’ 다음 ‘라이팅힙’이 온다: 손끝에서 시작되는 한 줄의 ‘힐링’

  • 작성자 사진: artviewzine
    artviewzine
  • 4월 15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6일

몇 년 전부터 이른 아침에 일어나 자기계발의 시간을 갖는 ‘미러클 모닝’이 유행이지만, 정작 아침에 무엇을 해야 되는지 막막하다. 최근에는 사각사각 종이에 연필로 글자를 쓰며 아침을 시작하는 필사가 좋은 취미로 떠올랐다. 종이에 좋은 구절을 하나씩 따라 써 보면 문장력과 어휘력뿐 아니라 마음의 근력까지 키울 수 있게 된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필사로 정신을 가다듬는 사람들이 늘면서 관련서들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온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사는 디지털 피로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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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유행은 현재진행형

교보문고에 따르면 필사 관련 출간 종수가 작년부터 증가 추세다. 2022년 61권, 2023년 57권에서 작년 한 해 동안 82권으로 전년 대비 43.9%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이 같은 추세는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30세대가 필사 유행을 이끌고 있다. 연령별로 올해 필사 관련 책을 구입한 비중을 보면 20·30대가 52.1%를 차지했다. 20대 비중이 확연하게 늘어 작년 8.8%에서 올해 21.3%로 증가했다. 30대 비중은 작년 28.6%에서 올해 30.8%로 소폭 증가했다.


필사 열풍 이유? 문장력·어휘력 높이기 위해

젊은 세대에 필사 열풍이 부는 이유는 우선 훌륭한 문장을 베끼면 글쓰기 연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여전히 높은 문장력과 어휘력이 요구된다. 베스트셀러인 필사 책 제목만 봐도 이 같은 수요가 읽힌다.『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등이 있다.

이 책들은 왼쪽 장에 박완서, 김애란부터 헤르만 헤세, 알랭 드 보통까지 국내외 문학인들의 다양한 글을 싣고, 오른쪽 장은 빈 공간으로 편집된다. 필사할 때 책이 잘 펼쳐지도록 사철 제본되거나 필기감 좋은 모조지로 구성된다.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 위즈덤하우스,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필사책 © 책폴


때로는 심리적 위안 얻기도

아날로그적 행위인 필사를 통해 디지털 시대에 위안을 얻으려는 심리적 요인도 작용한다. 조용히 한 글자씩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단단해진다. 필사 노트를 따로 장만해 여기저기서 내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을 수집하는 경우, 시간이 지난 뒤 일기장처럼 당시 나의 감정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2030세대, 특히 20대가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의 안정감을 찾기 위해 필사를 한다”며 “손 글씨로 문장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30세대는 정성스럽게 필사한 노트를 찍은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해시태그 ‘필사스타그램’은 이미 12만 건을 넘어섰다. 자신이 필사한 문장, 각자만의 필사 방법까지 활발하게 공유하고 있다. 손 글씨와 필사를 힙한 문화로 즐기는 ‘라이팅힙(writinghip)’ 현상이다.

무엇을 필사하느냐도 중요한 자기표현의 수단이 된다. 소설, 시, 수필부터 영어 원서까지, 필사하는 책의 종류는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드러내는 존재가 된다. 이른바 ‘텍스트힙’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책을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필사책도 취향 따라

공급도 이에 발맞춰 다양한 분야에서 필사 책이 나오고 있다. 단순히 문학 작품의 필사를 넘어서 최근에는 헌법, 가사, 힐링 문장 필사집까지 출간되고 있다. 특히 최근 정세와 맞물린 『헌법 필사』가 품귀 현상을 빚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헌법 전체를 조문 순서대로 제시하고 따라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구성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필사책』은 민주주의·정치·인권·시민의식·주체적 삶의 가치를 다룬 글귀와 명언을 담고 있다. 필사하면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을 수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가사 필사집도 인기다. 한 편의 시 같은 노랫말을 직접 따라 쓰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아이유 가사 필사집』에는 아이유의 노래 63곡, 『DAY6 가사 필사집』에는 DAY6의 노래 97곡이 수록돼 있다. 책 속 QR코드를 통해 노래를 들으며 필사할 수 있다.『김광석 노래 필사하기』와 『AKMU(악뮤) 가사 필사집』『태연 가사 필사집』도 출간됐다.

독자의 마음을 다독였던 책을 필사 노트 버전으로 재출간한 경우도 있다. 법륜 스님의 문장을 모은『지금 이대로 좋다 필사 노트』와 심리상담사인 고은지 저자가 쓴 『오늘도 잘 살았네』속 문장들을 직접 적어 보는 필사 에디션이 잘 팔리고 있다. 이 책들은 ‘필사는 손으로 하는 명상’이라며 긍정 확언을 통한 정신력 증진을 강조한다.


헌법 필사 © 더휴먼 / 한강 스페셜 에디션 © 문학동네


필사 열풍에 바빠진 출판사, 필기구도 인기 만점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필사를 활용한 출판사의 마케팅도 늘어나고 있다. 문학동네는 ‘한강 스페셜 에디션’을 출간하면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흰』『검은 사슴』작품과 함께 필사 노트를 추가해 판매 중이다. 독자들은 필사 인증샷을 올리는 등 반응이 좋은 편이다.

특히 에세이의 경우 독자들이 필사할 수 있게끔 ‘에세이 겸 필사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재은 아나운서의 에세이 『오늘 가장 빛나는 너에게』는 책 안에 메모나 필사를 할 수 있는 여백을 마련했다. 황가람 가수의 에세이 『나는 반딧불』은 ‘필사를 부르는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좋은 문장을 담았다.

필사를 위한 필기구 판매 역시 증가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29CM는 올해 들어(1·2월 기준)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이 전년 대비 75% 증가했다고 밝혔다. 카테고리별로 보면 고급 만년필, 볼펜, 연필 등 필기구는 2.4배 늘었고 다이어리·플래너는 64%, 노트류는 43% 이상 거래액이 증가했다. 특히 고급 문구용품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내외 고가의 문구 아이템을 소개하는 브랜드 ‘포인트오브뷰’는 거래액이 전년 대비 7.6배 넘게 증가했다. 해외 유명 연필을 선보이는 브랜드 ‘흑심’과 디자인 문구 브랜드 ‘오이뮤’의 거래액도 2배 이상 증가했다.

29CM 관계자는 “텍스트힙 열풍에 이어 필사하거나 일기를 쓰는 등 손 글씨로 기록하는 문화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문구 수집가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사 열풍을 따라 만년필과 볼펜, 연필 등 필기구 판매 역시 증가하고 있다 @ ChatGPT
필사 열풍을 따라 만년필과 볼펜, 연필 등 필기구 판매 역시 증가하고 있다 @ ChatGPT

글쓰기 플랫폼에도 관심

남의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나만의 문장을 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이에 따라 네이버 블로그와 카카오 브런치스토리 같은 글쓰기 플랫폼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에 따르면 2023년 126만 개의 블로그가 신규로 개설됐는데 작년에는 214만 개로 전년 대비 약 70% 증가했다.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불리는 카카오의 브런치스토리는 별도의 작가 승인 제도를 통과한 작가들만 글을 작성할 수 있는 글쓰기 플랫폼이다. 작년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10월 2030세대의 브런치 이용자는 전월 대비 11.3%나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는 “쇼트폼 영상에 피로감을 느낀 MZ세대들이 긴 호흡의 텍스트 콘텐츠에 몰입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며 “이에 따라 네이버 블로그, 카카오 브런치 같은 글쓰기 기반 플랫폼의 인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글쓰기 관련 책도 부상하고 있다. 미국 기호학회 회장을 지낸 나오미 배런 아메리칸대 언어학 명예교수는 저서 『쓰기의 미래』에서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이핑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지루한 일”이라면서 “손의 움직임과 생각 사이에서 형성되는 강한 유대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페이지 전체가 손 글씨로 채워졌을 때의 만족감은 산을 올랐을 때와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배런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쓰기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는 만큼, 필사 유행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윤예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뉴욕 특파원 및 금융부, 부동산부, 증권부 등을 거쳐 현재 문화스포츠부에서 출판·문학·공연 분야를 취재하고 있다. 매주 수많은 책과 공연 중에서 소개할 작품을 선정해 쉽고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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